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우연과 상상'
친구 둘이 일을 마친 후 택시를 함께 탄다. 수다가 쏟아진다. 츠구미(현리)는 최근 만난 남자의 면면을 친구 메이코(후루카와 고토네)에게 전한다. ‘선수’ 같으면서도 순정한 모습이 인상 깊다고, 집과 사무실을 함께 쓰는 사람이라고, 다음 만남이 기대된다고 말한다. 미소와 호기심으로 채워졌던 메이코의 얼굴에 당혹이 살짝 감돈다. 츠구미가 먼저 하차한 후 메이코는 목적지를 바꿔 한 남자의 사무실로 향한다. 즈구미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관객은 쉬 눈치 채지 못했던 일들이 이어진다. 일본 옴니버스 영화 ‘우연과 상상’(2021) 속 첫 번째 에피소드 ‘마법(보다 더 불확실 한 것)’은 큰 의문부호를 스크린에 띄우며 어떤 기묘한 이야기들이 펼쳐질지 예고한다.
‘우연과 상상’ 속 일들은 별스러우나 누구에게나 일어날 법하다. 두 번째 이야기 ‘문은 열어둔 채로’는 도발적인 젊은 남녀와 고지식한 교수의 사연이다. 막 대학을 졸업한 사사키(가이 쇼마)는 소설가인 세가와(시부카와 기요히코) 교수에게 앙심을 품고 있다. 졸업 학기에 낙제점을 줘 방송국 입사가 취소됐기 때문이다. 유부녀인 여자친구 나오(모리 가츠키)를 꼬드겨 복수를 꾀한다. 나오는 세가와 교수를 찾아가 그의 소설 속 야한 대목을 낭독한다. 유혹하기 위한 시도였으나 학생을 맞을 때마다 문을 열어놓는 세가와 교수는 꿈쩍도 않는다. 나오는 교수의 인품에 놀라 자신의 불온함을 반성한다. 하지만 두 사람이 나눈 사적 대화는 예기치 않은 일을 불러온다.
세 번째 이야기 ‘다시 한 번’은 평범한 듯한 소재를 바탕으로 깜짝 놀랄 만한 반전을 안긴다. 고향 동창회에 참석해 20년 전 인연과 재회하고 싶은 여성의 이야기가 가벼운 충격과 유쾌한 웃음과 진한 여운을 빚어낸다. 옴니버스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기엔 충분하다.
세 가지 이야기는 언뜻 보면 공통점이 없다. 하지만 찬찬이 들여다 보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있다. 각 이야기들이 진행될수록 주인공들의 공고한 믿음과 이성은 무너지고 허상과 착각이 드러난다.
심각한 주제 의식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우연'히 일어난, '상상' 속 일과 같은 별난 사연들을 편하게 즐겨도 된다. 어떤 이야기는 비밀스러운 해프닝으로 끝나며 웃음을 주고, 어떤 이야기는 에로틱하면서 황망하며 또 다른 이야기는 소꿉놀이 같은 어른들의 역할극으로 위안을 안긴다. 가볍게 와인으로 목을 축이고 전채 요리를 먹은 후 메인 요리를 접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어디로 흐를지 모르는 이야기의 성찬이다.
하마구치 류스케(44) 감독은 ‘해피 아워’(2015)와 ‘드라이브 마이 카’(2021) 등에서 보여줬던 이야기꾼의 자질을 다시 발휘한다. 유치와 재치라는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서 관객의 호기심을 유지하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하마구치 감독은 이 영화로 지난해 베를린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드라이브 마이 카’로는 지난해 칸영화제 각본상을 가져갔다. 한 해 세계 3대 영화제(베니스영화제 포함) 중 2곳에서 주요 상을 받는, 흔치 않은 기록을 세웠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우연과 상상’은 이 괴물 같은 감독이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영화 팬들을 들뜨게 하고 즐겁게 할 것이라는 보증서와도 같다. 4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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