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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집애같이 울지 않겠다는 결심, 꼭 해야 하나

입력
2022.04.3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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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슬픔=무능=병'이란 도식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비평 전문가 이연숙 작가는 영화, 미술, 만화 등이 여성을 어떻게 그리는지를 통해 성별화된 감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우리는 어느 정도의 슬픔은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감정적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사랑하던 대상을 상실한 이후 일정 기간 슬프고 우울한 사람을 보고 우리는 '그 사람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럴 때 우리는 슬픔을 소화하는 '작업'에는 시간과 힘이 든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승인하고 있는 것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슬픔을 일반적인 것과 '문제적인' 것으로 나눠 구분했다. 위키피디아 캡처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슬픔을 일반적인 것과 '문제적인' 것으로 나눠 구분했다. 위키피디아 캡처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1917년 발표한 논문 '애도와 멜랑콜리(Trauer und Melancholie)'에서 상실 이후 겪는 일반적인 수준의 슬픔과 '문제적인', 즉 병리적인 슬픔을 구분한다. '정상적인' 슬픔의 경우 내가 사랑했던 그 대상이 이제는 내게서 상실되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임으로써 '처리'된다. 이 경우 슬픔은 일상 생활과 병존할 수 있다.

한편 '문제적인' 슬픔은 다음의 특징을 가진다. "심각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낙심,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의 중단,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 모든 행동의 억제, 그리고 자신을 비난하고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을 정도로 자기 비하감을 느끼면서 급기야는 자신을 누가 처벌해 주었으면 하는 징벌에 대한 망상적 기대… 자애심(自愛心)의 추락"이 바로 그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런 수준의 슬픔은 상실된 대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상실을 인정할 수 없을 때, 사랑했던 대상에게 투자한 애정과 증오는 나 자신에게 고스란히 흡수되어 나의 일부가 되는데, 이 때문에 '위험한' 수준으로 슬프고 우울해진다는 것이다.

어쩌다 슬픈 사람은 위험 인물이 되나

알브레히트 뒤러의 1514년 판화 '멜랑콜리아 I'. 어지럽게 널브러진 물건들 사이에서 날개 달린 여성이 머리를 감싸쥐고 있는 모습으로 우울한 감정(멜랑콜리)을 의인화한 작품이다. 위키피디아 캡처

알브레히트 뒤러의 1514년 판화 '멜랑콜리아 I'. 어지럽게 널브러진 물건들 사이에서 날개 달린 여성이 머리를 감싸쥐고 있는 모습으로 우울한 감정(멜랑콜리)을 의인화한 작품이다. 위키피디아 캡처


열거했다시피 슬픈 사람은 바깥 세상에 대한 관심도 없고 행동 능력 역시 없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위험'할 수 있을까? 프로이트는 그것이 그들의 자기로 향하는 '사디즘'적 성향, 즉 '자살 성향' 때문이라고 언급한다. 이후의 논문에서 그는 '위험한' 슬픔을 병리적인 차원에서 다루는 대신 한 개인의 성격 형성의 계기로서 수용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렇기는 해도, 깊은 슬픔이 '위험'하고 그래서 '병리적인 문제'로서 다뤄지는 중요한 이유가 바로 그들의 '자살 성향' 때문이라는 프로이트의 언급은 흥미롭다. 다른 이들에 대한 어떤 적극적이고 물리적인 위해도 가하지 않는, 일견 수동적이고 무감각한 깊은 슬픔의 상태가 '위험'할 수 있다니. 슬픈 사람은 다만 죽도록 슬퍼할 뿐, 누구에게도 직접적인 해를 끼친 적이 없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슬픈 사람이 위험한 이유는 그가 슬퍼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비약이 가능해진다. 그는 고집스럽게 슬퍼하는 것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에, 그리고 슬퍼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 '위험한' 존재가 된다.

한편으로 그는 슬픔에 빠진 동물로서 상실 대상을 자기 자신에게 흡수하는 것에 몰두하는 작업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일에 무관심해진다. 그는 그의 기존 사회적 관계들과 일상적 활동들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달아나며 슬픔을 품는 일에 집중한다. 말 그대로 슬픔에 '잠긴' 이 사람은, 굳이 '극단적인 선택'이 아니더라도 이미 자기 보존 본능에 반하는 방식으로 존재하기를 원하기에, 이때 슬픔은 한 개체로서의 인간 삶에 치명적이고 '위험'할 수 있다.

도태되지 않으려 관리되는 슬픔

다른 한편으로 슬픈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에, 즉 노동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게으르고 무능하며 쓸모없는 사람으로서 받아들여지는 현실이 있다. 비생산적이고 무능력한 것에 대한 우리의 학습된 혐오는 대단히 뿌리 깊다. 우리가 슬픔에 빠져 몇 년씩이나 매일같이 울지 못하는 까닭은, 물론 몸과 마음이 고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세상이 그런 사람들을 한심하게 여기도록 가르쳤기 때문이다.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어른의 상(想)에 자기 자신을 끼워 맞추고 그러한 상과 일치되도록 노력하는 우리의 열정은, 결국 자본주의 사회를 영속시키는 무한 동력인 자기 착취의 한 형태일 것이다. 그럼에도 소위 '갓생(규범적인 삶)'과의 애착적 관계를 포기할 수 없는 우리는, 지나친 슬픔 때문에 '도태'되지 않기 위해 자기 감정을 관리하고 다른 사람들의 슬픔과 경계를 짓는다.

이 과정에서 슬픔을 관리하는 것은 성숙한 인간의 능력이지만, 일을 못할 정도로 슬픔에 '빠지는' 것은 한심하고 이기적인 것이며 따라서 '병적인' 것이라는 도식이 강화된다. 후자가 세상으로부터 동정과 지탄을 받는 동안, 슬픔을 '적당히' 겪고 '잘' 극복한 사람의 이야기는 모두가 욕망하는 사회의 모범이 된다.

페미니스트 학자 제니퍼 실바와 그의 책 '커밍 업 쇼트' 표지. 구글 캡처

페미니스트 학자 제니퍼 실바와 그의 책 '커밍 업 쇼트' 표지. 구글 캡처


이는 사회학자 제니퍼 실바가 '커밍 업 쇼트'에서 고안한 사회경제적 분석틀인 '무드 경제'를 상기시킨다. 무드 경제란, 감정을 관리하고 조직하는 능력이 성인으로서 인정받는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 잡은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개념이다. 에바 일루즈의 '치료 서사' 같은 개념과 마찬가지로 실바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인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 고통을 변형하여 정체성의 밑거름으로 삼는 법에 능숙해져야만 하는 현실을 비판한다.

실바에 따르면, 우리는 근본적인 구조적 억압으로부터 기인한 과거의 관계, 감정·정신·인지 장애, 각종 중독과 같은 개인적인 역사를 '고통스러운 것'으로 인지한다. 이러한 고통을 '극복'하는 데에는 과거의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 비난, 분리와 같은 변형의 과정이 필수적으로 수반된다. 개인의 노력으로 고통의 원인인 구조적 억압을 제거하기란 거의 불가능하지만, 제거했다고 '믿는' 것, 즉 '정신 승리'하기란 그나마 쉽다. 그토록 많은 자기계발서들이 감정 관리를 강조하는 이유다.

적당한 슬픔이 요구되는 진짜 이유

무드 경제라는 개념이 지적하는 것은 결국 우리 시대의 감정 관리 규율이란 망가진 세상을 유지하고 보수하는 장치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종종 슬픔에 잠겨 울며 누워 있는 사람에게 '이기적으로 굴지 말라'고, '너만 슬픈 거 아니'라고, '작작 좀 하라'고 다그치게 된다.

그가 그만 슬퍼야 하는 이유는 물론 그 자신이 슬픔이라는 치명적인 감정에 잠식되어 삶의 복구 능력을 잃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공공연한 슬픔 그 자체는 우리 자신의 상실 경험과 미완수된 애도 작업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슬픈 사람은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 상실 대상에 대한 공동 책임감을 일깨우는 '불편한' 존재가 된다.

동시에 우리는 한 사람이 슬퍼할 수 있는 적당한 기간이란 얼마인지, 즉 한 사람이 슬퍼하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면책받는 기간이란 얼마인지 자문할 수 밖에 없다. 이쯤 돼서 질문으로 돌아가자. 프로이트가 지적한 슬픈 사람의 자기 파괴적이고 세상에 무관심한 경향은 왜 '위험'하고 그래서 병리적인가?

왜냐하면 그가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의 몫을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세상에서 깊은 슬픔은 반드시 병이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아프고 무능하다는 낙인이 두려워진 사람들이 적당히 슬프기를 훈련할 테니까. 만약 슬픔 때문에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세상이 된다면, 우리 중 누구도 일을 하기 위해 적당히 슬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도래할 슬픈 사람들의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무능력한 슬픔을 마음껏 용서할 권리가 있다.

이런 세상에서 문명은 느리고 더디게 발전하거나 또는 프로이트가 걱정한 것처럼 '퇴행'하겠지만, 뭐 어떤가. 슬픈 사람의 현실인 심리적 풍경에서 세상은 언제나, 이미 끝장 나 있기 때문이다.

'계집애 같은 울보'들의 저항

시인이자 페미니스트인 앤 보이어가 유방암 진단을 받은 후 투병 과정을 기록한 책 '언다잉'. 구글 캡처

시인이자 페미니스트인 앤 보이어가 유방암 진단을 받은 후 투병 과정을 기록한 책 '언다잉'. 구글 캡처


'언다잉'에서 앤 보이어는 '통곡을 위한 공공장소'를 구상한 일에 대해 말한다. 이 장소는 누구든 울고 싶을 때 모여 울 수 있는, "슬픔을 공유하는 정교한 건축물"이다. 나중에 그는 항암 치료의 부작용으로 인해 아프건 슬프건 그렇지 않건 간에 막무가내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통곡을 위한 사원을 세울 필요가 없어졌는데, 왜냐하면 그 자신이 "민망한 이동식 공공 눈물 사원" 그 자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슬픔과 친화력이 있는 나의 일족들을 생각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슬프고 아파서 침실에서 울고 화장실에서 울고 버스에서 울고 학교에서 울고 직장에서 우는 고집스럽고 무능한 울보들이다. 울보들은 남성적인 질서로 작동하는 자본주의에서 감정을 통제할 줄도 모르는 어린 여자, 즉 '계집애 같은 것들'로 취급되며 수치를 느낄 것을 강요받는다.

그러나 울 줄 안다는 것이, 그 많은 상실과 상처 이후에도 여전히 스스로의 취약성과 예민함에 반응한다는 것이, 왜 수치스러워야 할 일인가? '이동식 공공 눈물 사원'인 '계집애 같은 울보'들의 적당히를 모르는 슬픔은, 이 따위 세상에 수동적으로 저항하는 무능한 열정이다.


이연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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