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초기 임상시험 인프라 기반으로
신약개발 전 과정 '원스톱 서비스' 자신
시간·비용 줄이고 다양성 확보... "투자 중요"
"호주 첫 코로나19 백신은 이제 임상 1상에 들어갔지만 그렇게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임상시험부터 연구·생산 인프라 등이 다 여기 있기 때문이죠. 3~5개월 뒤 안전성과 효과성이 입증되면 정부, 업계, 학계가 한 몸처럼 협업해 생산까지 이어갈 겁니다."
지난달 7일 호주 빅토리아주 멜버른의 모나시 약학대학에서 만난 메신저 리보핵산(mRNA) 연구진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mRNA 백신 기술과 임상시험을 비롯한 개발 인프라를 모두 보유하고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모나시 약학대학은 올해 영국 대학평가기관 QS의 세계대학랭킹 '1위 약학대학'에 오른 곳이다. 약학 분야에서는 미국 하버드와 영국 옥스퍼드마저 따라잡았다. 연구진은 미국 화이자나 모더나보다 mRNA 백신 개발에 늦게 착수했지만 "백신주권 확보가 중요한 만큼 사업성이나 실효성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지난달 3일부터 1주일간 '팬데믹 시대 한·호주 보건의료 연구개발(R&D) 협력'을 주제로 한국여성기자협회가 마련한 취재 현장에서 접한 호주의 바이오산업 생태계는 촘촘하면서도 유기적이었다. 임상시험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신약이나 백신 출시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는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시드니 뉴사우스웨일스 주정부 사무실에서 만난 수잔 피어스 보건청 정책보좌관도 "호주는 잘 짜여진 공공의료 시스템을 기반으로 임상시험 분야에서 앞서 나가고 있다"며 "특히 신약개발에 있어 전 과정을 한 번에 해결 가능한 '원스톱 서비스'가 강점"이라고 말했다.
빠르고 저렴하면서 신뢰도 높은 임상시험
호주가 '임상시험의 천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정부 차원의 노력과 타고난 환경이 시너지 효과를 냈기 때문이다. 특히 초기 임상에 선택과 집중을 한 점이 호주의 특장점이 됐다. 빅토리아 주정부 자금으로 설립돼 호주 최대 임상 1상 전문 기업으로 성장한 뉴클리어스 네트워크(Nucleus Network)의 제프리 웡 디렉터는 "3·4상은 환자 수가 중요해 미국이 유리할 수밖에 없지만 1·2상은 생태계와 문화가 제대로 자리 잡은 호주가 경쟁력을 가진다"고 강조했다.
임상시험에 돌입한 제약사에 시간은 곧 돈이다. 빠른 일 처리 속도가 필요한 이유다. 웡 디렉터는 "인체연구윤리위원회(HREC) 통과에 4, 5주, 지원자 모집을 포함한 임상시험 착수까지 8~10주밖에 걸리지 않는다"라며 "이 과정에 4~6개월이 필요한 미국과 비교하면 엄청난 속도"라고 설명했다. 임상시험에 식품의약품안전처 승인이 필요한 우리와 달리 호주는 HREC를 통과하면 규제당국(TGA)에 통지만 해도 된다. 또한 미국 식품의약국(FDA)이나 유럽 의약품기구(EMA)에서 요구하는 글로벌 기준에 맞는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세제 혜택도 무시할 수 없다. 빅토리아 주정부 기관 'mRNA빅토리아'의 마이클 카펠 대표는 "미국 제약사들이 임상시험을 위해 많이 오는데, 가장 큰 이유는 비용"이라며 "최대 43.5%의 세제 혜택을 주기 때문에 미국에 비해 60%까지 저렴하다"고 말했다.
유럽계 백인부터 아시아인, 아랍인까지 다인종·다민족 사회인 호주는 임상시험 과정에서 이 장점을 십분 살린다. 인구학적 특성 덕에 호주에서는 '이탈리아인' '중국인' 등 특정 인종·민족을 뽑아서 임상시험을 진행하는 '가교시험(Bridging Study)'이 가능하다. 최근 미국 FDA가 임상시험에서 인종적 다양성을 강화하도록 지침을 내면서 다민족 임상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임상시험에 대한 긍정적인 문화 덕에 참가자 모집도 어렵지 않다. 임상시험기관 사이언티아(Scientia)의 샬럿 르멕 디렉터는 "자체 보유한 2만5,000명이 넘는 데이터베이스에서 건강한 지원자를 찾고, 국가 연구 클라우드 '넥타르(NECTAR)' 네트워크를 이용해 환자 지원자를 받는다"고 설명했다. 지원자에게는 하루 평균 480호주달러(약 43만 원)가 보상된다. 웡 디렉터는 "코로나 기간 동안 지원자 모집이 어려웠지만 팬데믹 이후엔 임상시험에 대한 인식이 오히려 좋아졌다"고 말했다.
이런 강점 때문에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도 호주로 달려간다. 셀트리온이 지난해 코로나19 치료제 '렉키로나' 흡입제 임상 1상을 진행하는 등 임상시험과 신약 개발 분야에서 호주와의 협력이 확대되고 있다.
바이오 인프라 경쟁적 투자..."보건뿐 아니라 경제 측면서도 중요"
호주 바이오 산업이 최근 5, 6년 사이 급부상할 수 있었던 건 R&D부터 임상시험, 생산·제조까지 이어지는 생태계에 아낌없는 투자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연방제 특성상 연방정부 차원의 지원뿐 아니라 각 주정부가 경쟁적으로 바이오 인프라 형성에 뛰어들었다. 시드니가 있는 뉴사우스웨일스주와 멜버른을 품은 빅토리아주가 대표적이다.
뉴사우스웨일스주는 임상 1상 전문 비영리기관 사이언티아를 비롯해 호주 최대 바이오뱅크 등을 만들어 인프라 형성에 공을 들였다. 빅토리아주는 1,200만 달러(약 180억 원)를 투입해 의료혁신기술 허브 'AMMC'를 만들고, 20년간 사용할 수 있는 의료연구 기금 '돌파 펀드(Breakthrough Fund)'를 조성했다. 각 주정부가 대학과 공립병원, 연구소를 중심으로 여러 의료지구를 지정해 기술과 인재가 모여들도록 판을 깐 것도 수년에 걸친 계획과 투자의 결과물이다.
린다 크리스틴 빅토리아주 보건의료연구 디렉터는 "정부가 의료 연구에 1달러를 투자하면 해당 분야에서 4.5달러 이상의 추가 소득이 발생한다"며 "바이오 생태계가 보건뿐 아니라 경제 차원에서도 중요하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이어 "코로나를 겪으며 연방정부와 각 주정부가 의료연구의 중요성을 제대로 깨달았기 때문에 앞으로 관련 투자와 지원이 계속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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