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뽀로로의 캐릭터 '루피 짤' 온라인에서 인기
유행에 힘입어 각종 브랜드와 협업 진행
명품 주얼리 끼고 화보 촬영하기도
누리꾼들 "어린 아이들에게 악영향 걱정된다"
과도한 상업화에 추억 망가진다는 우려도
동그란 귀에는 형형색색의 보석 귀걸이를 달고 있고, 검붉은 손톱에는 반짝거리는 반지를 끼고 있다. 화장대 앞에 앉아 마치 연예인처럼 화장을 받기도 한다. 어린이들의 영원한 친구, '뽀롱뽀롱 뽀로로'의 캐릭터 '루피'가 13일 패션 잡지 보그에 등장했다. 명품 브랜드 불가리가 루피를 게스트 앰배서더로 발탁하면서 각종 액세서리를 걸치고 화보 촬영을 진행한 것.
이를 두고 온라인에서 반응이 엇갈렸다. "루피가 어른이 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귀엽다"는 누리꾼이 있는가 하면 "내가 알던 루피가 귀걸이를 달고 화장을 받으니 기괴하다"는 누리꾼도 있었다.
잡지의 기사를 자세히 보면 캐릭터의 이름이 그냥 루피가 아닌 '잔망 루피'라고 되어 있다. 잔망 루피는 루피의 부캐다. 부캐는 부캐릭터의 줄임말로 평소와는 다른 모습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중학생 누리꾼에서 시작한 '군침 도는 루피' 짤
잔망 루피가 등장한 배경에는 루피 짤의 유행이 있었다. 2019년 한 중학생 누리꾼은 사진 편집 애플리케이션(앱)을 이용해 루피의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이를 온라인에 공유했다. 사람들은 추억의 캐릭터 루피의 색다른 모습을 보며 열광했다. 그리고 더욱 다양하게 루피를 변형했다. 루피 얼굴에 수염과 눈물을 그리거나 가수 비가 부른 '깡'이라는 노래의 무대 의상을 입혀 짤로 이용했다.
뽀로로 담당 마케터는 2020년 언론 인터뷰에서 짤의 유행을 두고 "루피가 귀엽고 착한 이미지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괴롭히고 싶어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답했다. 뽀로로 담당 디자이너는 "(루피 짤을) 회사원 콘셉트랑 엮으면 더 재미있을 것 같다"며 "사람들이 더 망가뜨려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를 본 누리꾼들은 "아동 콘텐츠를 제작하는 회사로서 최소한의 책임감을 가지고 잘못된 방향으로 캐릭터의 이미지를 소비하지 않아야 한다"며 걱정했다.
도를 넘은 짤에 "추억 망가진다"
루피 짤에서 욕설을 붙이거나, 청소년 관람불가 책을 루피의 손에 들리는 등 도를 넘는 변형이 생기자 "학교 끝나고 만화를 봤던 어릴 적 추억이 망가지는 기분이다", "아무리 만화 캐릭터라지만 작품 내에서는 아이인데 욕설을 쓰는 것은 너무하다"와 같은 반응이 누리꾼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그동안 애니메이션을 즐겨 보던 세대가 자라면서 성인의 시선으로 캐릭터를 다시 조명하는 사례는 꾸준히 있었다. '짱구는 못 말려'의 등장인물 '훈이'의 경우 과자를 얻기 위해 '짱구'를 악당에게 넘기는 에피소드가 화제가 되면서 캐릭터의 이름을 '훈발놈'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도라에몽'에 나오는 '퉁퉁이'와 '비실이'에게는 문신과 명품 가방을 합성하여 요즘 일진 짤이라며 공유되기도 했다.
미국의 만화 캐릭터 '개구리 페페'도 피곤한 모습의 현대인을 나타내는 짤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재미로 이용되는 것을 넘어 극우 성향의 커뮤니티에서 나치 문양을 합성하는 등 인종차별 짤로 악용되었다. 결국 작가 맷 퓨리는 "캐릭터가 혐오의 상징으로 쓰이는 것이 싫다"며 2017년 페페의 장례식 그림을 그려 공식적으로 캐릭터가 사망했다고 선고했다.
B급 감성으로 재탄생한 '잔망 루피'
루피 짤의 인기가 계속되자 뽀로로 제작사 아이코닉스는 잔망 루피라는 이름의 카카오톡 이모티콘을 2020년 7월 출시했다. 해당 이모티콘은 온라인에서 화제를 모았던 대표 짤들로 구성됐다. 온라인 공간에서 짤의 형태로 존재했던 '또 다른' 루피를 상품으로 만들어 상업화하기 시작한 것.
하지만 잔망 루피의 데뷔 무대는 출시 세 시간 만에 판매 중단이라는 상황을 맞닥뜨려야 했다. 비속어와 여성 비하 표현이 쓰인 짤을 그대로 이모티콘으로 만들다 보니 욕설과 여성 비하 표현을 그대로 실었고 이 때문에 비난을 받았던 것. 결국 문제가 됐던 이모티콘을 뺐다.
아이코닉스는 같은 해 11월에는 잔망 루피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을 시작하면서 기존 루피와 차별화를 시도했다. 소개 영상에서 루피는 "모두들 나를 친절하고 상냥한 뽀로로의 친구로 알고 있지만 그런 사람들의 기대가 지친다"며 "인터넷에서는 원래와 다른 모습을 좋아해 준 덕분에 용기를 얻어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로 했다"고 말한다.
잔망 루피와 협업을 진행한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와디즈는 "루피의 잔망스러움을 과장해 B급 감성을 드러냈다"고 설명한다. 흔히 아는 '직접 한 요리를 친구들과 나눠 먹는 것을 좋아하는 상냥한 꼬마 비버'와 잔망 루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다.
"내가 알던 루피는 명품 반지 끼는 비버가 아냐"
그러나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겉보기엔 루피와 똑같은데 이름만 바꾼다고 해서 다른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차가운 반응이 나왔다. 심지어 아이코닉스가 관리하던 잔망 루피의 공식 트위터 계정에는 애니메이션 뽀로로의 장면 일부를 짤로 만들어 올라오는 등 기존의 루피와 섞어서 쓰기도 했다.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잔망 루피는 도미노피자, 버거킹, 삼성전자, 세븐일레븐, 스파오, 유한킴벌리, LG트윈스 등 수많은 유명 브랜드와 협업을 진행하며 쓰임새를 넓혔다.
보그가 진행한 잔망 루피와 가상 인터뷰는 마치 실존하는 인물과 대화하는 것처럼 꾸며졌다. 일상을 묻는 질문에 잔망 루피는 "갓생(열심히 사는 것)을 위해 미러클 모닝(일찍 일어나 여가 활동을 하는 것)에 도전하고 있다"며 "SNS를 보다가 자꾸 늦게 자는 바람에 일찍 일어나기 어렵다"고 대답했다. 빵빵하고 귀여운 자신의 얼굴에 우아한 주얼리가 '착붙(잘 어울린다)'이라거나 "촬영 때 착용한 주얼리를 하고 로마 거리를 산책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누리꾼들은 "어른들 입맛에 맞추는 것을 넘어 루피를 명품 좋아하는 성인 여성 취급을 하고 있다"며 루피를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사용하다보니 이미지까지 바뀌었다며 불쾌함을 드러냈다. "뽀로로에 나오는 캐릭터 중 루피를 가장 좋아했다"며 "비싼 반지를 끼는 비버가 아니라 뽀로로에게 쿠키를 구워주는 소중한 친구로 남겨달라"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루피 숙취해소제에 "사탕인 줄 알았다"
잔망 루피를 좋아하는 이들 중에는 2000년대 뽀로로를 보며 자랐던 사람들이 상당수다. 20, 30대가 된 이들을 겨냥해 성인이 주요 고객층인 상품과 서비스의 모델에도 잔망 루피가 쓰이고 있다. 삼양사 큐원의 숙취해소제 '상쾌환'과의 협업에서는 "그대의 눈동자에 건배"와 같은 유명한 루피 짤을 표지로 썼다. 메이크업 전문 브랜드 '삐아'와 함께 잔망 루피의 그림이 그려진 화장품을 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애니메이션 뽀로로가 방영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같은 협업이 걱정스럽다는 사람들도 있다. 한 누리꾼은 "편의점에 아이들이랑 같이 갔는데 계산대 바로 옆에 루피 숙취해소제가 있었다"며 "나조차도 사탕으로 오해할 뻔했다"고 자신의 SNS에 글을 올렸다. "루피가 그려진 화장품이나 루피가 화장하는 모습을 보고 어린아이들이 따라 할 것 같아 걱정된다"는 반응도 있었다.
한편 "어린이용 미디어는 계속 등장하는데 뽀로로의 영향력은 예전 같지 않으니 잔망 루피라는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젓는 것"이라며 제작사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누리꾼들도 있었다. 루피 짤 덕분에 잊혔던 루피가 잔망 루피로 다시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낙흥 중앙대 유아교육과 교수는 한국일보와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 "잔망 루피 뿐만 아니라 성인 콘텐츠가 아이들에게 노출되며 생기는 부정적 영향이 있을 것이라 본다"고 말했다. "성인의 미디어 문화가 유아에게 실제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연구가 부족해 속단하기는 어렵다"면서도 "이제는 유아들이 미디어로부터 완전히 차단되기 힘든 상황이기 때문에 부모의 적절한 개입과 중재가 무분별한 노출로 인한 부정적 영향을 줄일 수 있을 것 같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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