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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슈퍼' 수사검사 사과했지만… 여전히 침묵하는 사법 가해자들

입력
2022.04.25 14:00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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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명 쓰고 진범 자백했지만 억울함 옥살이
경찰·검사·판사·변호인, 진실 외면 책임 회피
억울하다 호소했지만 되레 "용서 구하라"
배석판사 박범계·주임검사 최성우는 사과
"잘못 고칠 기회 있었지만 공권력 무책임"

'삼례나라슈퍼 강도치사 사건'은 1999년 2월 6일 전북 완주군 삼례읍 나라슈퍼에 3인조 강도가 침입해 금품을 강취하고 유모(당시 76세) 할머니를 질식사로 숨지게 한 사건이다. 경찰은 사건 발생 9일 만에 가난하고 배움이 짧았던 19~20세 '삼례 3인조' 임명선, 최대열, 강인구씨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체포했다. 강압수사로 인한 허위자백으로 이들은 3~6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됐다.

경찰·검찰·법원… 진실 외면한 그들

삼례나라슈퍼 강도치사 사건 관계도. 시각물=김문중 기자

삼례나라슈퍼 강도치사 사건 관계도. 시각물=김문중 기자

'삼례 3인조'가 누명을 썼지만 이들은 수사와 재판 단계에선 누구에게도 구제받지 못했다. 늦었지만 잘못된 수사에 책임을 지고 피해자들에게 사과한 이는 지난 17일 삼례를 직접 찾아 용서를 구한 최성우 변호사(수사 당시 주임검사)가 유일하다. 인권 보호의 최후 보루 역할을 해야 할 검사의 사명을 저버린 것에 대한 사과였다. 판사 중에선 2017년 2월 14일 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국회 의원회관에서 피해자들을 만나 사과했다. 박 장관은 삼례나라슈퍼 사건 1심에서 다른 판사가 자리를 비워 대신 재판에 들어간 배석판사로 오심의 주역은 아니었지만, 재심을 통해 무죄를 확정받은 피해자에게 사과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검사 개인이 수사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를 직접 찾아가 사과한 경우는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 진범을 무혐의 처분했던 김훈영 부장검사가 처음이었다. 김 부장검사는 범인으로 몰려 10년간 억울한 옥살이 후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 받은 피해자를 지난해 8월 14일 직접 찾아가 사과했다. (관련기사 : 늦었지만 용기 낸 검사의 사과 "당신의 억울함 밝혀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그동안 경찰과 검사, 판사는 재심으로 오판이 드러난 뒤에도 기관의 그늘에 숨어 과오를 고백하지 않았다. 삼례나라슈퍼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2016년 10월 28일 전주지법은 "17년간 크나큰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겪은 피고인들과 그 가족 여러분께 깊은 위로 말씀을 드린다"며 "설령 자백했더라도 정신지체 등 자기 방어력이 취약한 약자라는 점에서 좀 더 면밀히 살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에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재심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이 항소를 포기하자, 검찰과 경찰은 기관 차원에서 간략한 유감 표명만 했다.

억울하다고 호소했지만 되레 "용서 구하라"

'삼례나라슈퍼 강도치사 사건'의 범인으로 몰린 '삼례 3인조' 강인구씨가 1999년 2월 15일 작성해 경찰에 제출한 자술서. 당시 강씨는 한글을 쓸 줄 몰랐다.

'삼례나라슈퍼 강도치사 사건'의 범인으로 몰린 '삼례 3인조' 강인구씨가 1999년 2월 15일 작성해 경찰에 제출한 자술서. 당시 강씨는 한글을 쓸 줄 몰랐다.

방어 능력이 취약한 '삼례 3인조'에게 강압수사로 허위자백을 받아낸 경찰관들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아버지에 이어 2대째 발달장애가 있는 강인구씨는 당시 한글도 몰랐지만 경찰이 제시한 자술서를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뺨과 뒤통수를 맞고 가슴을 발로 채이며 따라 그렸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당시 담당 형사는 언론에 "(삼례 3인조는) 보기에는 아둔해 보이는데 범죄 유전자가 발달돼 있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삼례 3인조'를 수사했던 형사들은 이후 간부로 승승장구했고, 아직 현직에 남아있는 형사는 지난해 특진 후보에 올라 논란이 됐다.

'삼례 3인조'가 억울함을 풀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경찰과 검사는 번번이 진실 규명을 가로 막았다. 경찰은 '삼례 3인조'에 대한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던 1999년 4월, 진범의 지인으로부터 '범인이 따로 있다'는 제보를 받았지만 묵살했다. 이 제보는 '삼례 3인조'에 대한 대법원 확정 판결 직후인 같은 해 11월 부산지검에도 접수됐다. 범행 직후 모든 정황을 직접 전해 듣고 장물까지 확인했던 제보자의 구체적 진술로 '부산 3인조'는 검찰에 자백할 수밖에 없었지만, 당시 부산지검장은 '삼례 3인조'를 기소했던 전주지검으로 사건을 이첩하라고 지시했다. 전주지검 지휘부는 과거 '삼례 3인조'를 재판에 넘겼던 최성우 당시 검사에게 사건을 다시 배당했다. 수사검사가 기소해 유죄 확정 판결까지 받은 사건을 같은 검사에게 다시 살펴보라고 했으니 결과는 뻔했다. 진범들은 '우리가 범인'이라고 밝혔지만 무혐의 처분을 받았고, '삼례 3인조'는 결국 누명을 벗지 못했다.

재판부도 법정에 나온 '삼례 3인조'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3심제가 무색할 정도로 피고인들 주장은 재판부에 제대로 닿지 못했다. 1심 합의부는 간이공판절차에 따라 단 2번의 재판으로 유죄를 선고했고, 2심과 3심에서도 별 다른 심리없이 판결을 유지했다. 검찰 기소부터 대법원 확정 판결까지 불과 7개월 만에 초고속으로 재판이 마무리된 것이다. 최대열씨는 진범이 나타나자 2000년 재심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이마저도 받아주지 않았다.

'삼례 3인조'의 마지막 도우미가 됐어야 할 국선변호인들마저 이들을 외면했다.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이들에게 오히려 '용서를 구하라'고 설득한 것이다.

이처럼 '삼례 3인조'를 사법 피해자로 만드는 데 기여한 법조인들이 적지 않았지만, 이들은 현재 대부분 변호사로 활동하며 '무탈히' 지내고 있다. 당시 사법연수원생 신분으로 임명선씨의 1심 국선변호인을 맡았던 이는 부장판사가 됐다.

'삼례 3인조' 재심 사건 변호를 맡았던 박준영 변호사는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공권력은 무책임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주임검사였던 최성우 변호사에게 주로 책임을 물었지만 경찰, 검찰, 법원, 국선변호인 등 관련자 모두의 잘못으로 일어난 비극"이라며 "주임검사 못지않게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그들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유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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