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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인디언 대신, 살아남아 최악의 인디언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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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인디언 대신, 살아남아 최악의 인디언이 되리라”

입력
2022.04.15 04:3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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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그레이엄 존스 ‘엘크 머리를 한 여자’

엘크는 북아메리카와 동아시아에 서식하는 사슴과 동물이다. 10년 전 잔인하게 엘크를 사냥한 네 명의 인디언은 어느 날부터 이 엘크 머리를 한 여자의 환영을 보기 시작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엘크는 북아메리카와 동아시아에 서식하는 사슴과 동물이다. 10년 전 잔인하게 엘크를 사냥한 네 명의 인디언은 어느 날부터 이 엘크 머리를 한 여자의 환영을 보기 시작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좋은 인디언은 오직 죽은 인디언뿐이다.”(The only good Indian is a dead Indian.)

죽어야만 비로소 좋은 인디언이 된다는 이 유명한 반어 표현은 1869년 필립 셰리든 장군의 말에서 기원한다. 당시 서부 개척 중이었던 백인들은 여기에 방해되는 인디언들을 잔인하게 죽이고 있었는데, 코만치족의 추장이었던 토사위는 “나 토사위, 좋은 인디언(Me Toch-a-way, me good Indian)”이라고 말하며 부족원들을 이끌고 투항한다. 그러나 필립 셰리든은 “내가 본 좋은 인디언은 다 죽어버렸다”고 대꾸했고, 이 말이 훗날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뿐’이라는 말로 바뀌어 사용되게 된다.

최근 국내 번역 출간된 스티븐 그레이엄 존스의 장편소설 ‘엘크 머리를 한 여자’의 원제는 ‘The Only Good Indians(좋은 인디언은 오직)’이다. 원제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스릴러와 호러의 외피를 입은 이 소설은 인디언의 오래된 비극에서 출발한다. 실제로 작가는 북아메리카원주민인 블랙피트족 출신으로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원주민 이야기와 호러 소설을 주로 써왔다. 지금까지 30여 권의 책을 출간했으며 특히 그중 ‘엘크 머리를 한 여자’는 2020 브램 스토커상, 레이 브래드버리상, 셜리잭슨상, 2021 알렉스상을 수상하고 퍼블리셔스 위클리 선정 최고의 책으로 꼽혔다. 국내에는 이 작품을 통해 처음 소개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엘크 머리를 한 여자' 스티븐 그레이엄 존스 지음. 이지민 옮김. 혜움이음 발행. 488쪽. 1만6,500원

'엘크 머리를 한 여자' 스티븐 그레이엄 존스 지음. 이지민 옮김. 혜움이음 발행. 488쪽. 1만6,500원


이야기는 리키 보스 립스라는 한 원주민 남성이 인디언 자치지구(인디언 보호구역)에서 도망치다가 죽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표면적으로 볼 때 그는 술집 밖에서 백인 남성들과 몸싸움을 하던 중 사망했다. 그러나 독자는 그가 죽기 전 커다란 엘크(북아메리카와 동아시아에 서식하는 사슴과 동물)의 환영을 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리키뿐만이 아니다. 이어서 등장하는 루이스는 ‘사람의 것이 아닌’ ‘너무 무겁고 너무 긴 엘크 머리를 한 여자의 환영’을 보다가 자신의 아내와 직장 동료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자신 역시 죽임을 당한다. 이들의 친구인 게이브와 캐스 역시 마찬가지다.

이 네 명의 원주민 남성은 모두 10년 전 그날 밤 사건으로 인해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된다. 10년 전 추수감사절이 다가오는 시즌의 마지막 날, 이들은 마을 노인들에게 엘크 고기를 선물로 주고 싶다는 치기 어린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금기 구역으로 향한다. 운 좋게 부족 전체를 먹일 수 있을 만큼의 엘크를 사냥하게 되지만 이 사냥은 결국 핏빛 복수로 되돌아온다. 이들이 잔인하게 죽인 엘크 중에는 새끼를 밴 암컷 엘크가 있었다. 이들은 등뼈가 부러지고 머리의 절반이 날아가고도 죽지 않은 엘크를 몇 번에 걸쳐 잔인하게 죽인 뒤 태아 상태였던 새끼 엘크까지 뱃속에서 꺼낸다. 그리고 10년 뒤, 이들은 그날에 대한 죄책감과 공포에 시달리다 결국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스티븐 그레이엄 존스는 블랙피트족 출신으로 자전적인 북아메리카원주민 이야기와 호러 소설을 주로 써왔다. 혜움이음 제공

스티븐 그레이엄 존스는 블랙피트족 출신으로 자전적인 북아메리카원주민 이야기와 호러 소설을 주로 써왔다. 혜움이음 제공


소설은 '엘크 머리를 한 여자'라는 초자연적인 존재를 통해 직시하지 않은 폭력의 역사는 어떻게든 되살아나 새로운 파멸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원주민의 '학살자'로서의 정체성이다. 흔히 아메리카원주민을 등장시킨 이야기들은 이들을 백인이 저지른 학살의 희생자로만 그린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원주민은 미국 사회에서 폭력적으로 해체된 존재인 동시에, 자신보다 더 약자인 존재(엘크)에게 또 다른 폭력을 행사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즉, 폭력의 역사를 제대로 반성하지 않는다면 이 기억은 결국 더욱 더 약한 존재를 향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작가는 학살의 주체가 된 원주민을 통해 보여준다.

이 끔찍한 복수의 굴레를 끊는 것이 마찬가지로 인디언의 후손인 게이브의 딸 데노라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농구 선수인 데노라는 자신을 향해 “좋은 인디언은 오로지 죽은 인디언뿐”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노골적으로 멸시하는 백인들 앞에서도 결코 공을 놓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좋은 인디언은 오로지 죽은 인디언뿐이라면 자신은 최악의 인디언이 되리라” 끝없이 이어지는 폭력의 고리를 멈출 수 있는 방법, 그것은 경기에서 살아남아, 마침내 불끈 쥔 주먹을 들어 올리는 일이 될 것이다.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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