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이라는 말을 들으면 새마을운동을 떠올리기 쉽다. 박정희 정부가 1970년대 시동을 건 새마을운동은 농촌 근대화 운동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마을 곳곳에 내걸린 녹색 깃발, 어디에서나 들리는 ‘잘 살아보세’라는 노랫소리가 대표적 이미지이다. 좁았던 길이 넓어지고 초가지붕이 ‘쓰레뜨(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던 시절이다. 새마을 건설을 곧 새마을운동으로 여기는 관점에서는 이러한 풍경에서 냉전체제의 영향을 찾아내기가 어렵다.
새마을 건설은 곧 감시체제 구축
허은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는 최근 내놓은 저서 ‘냉전과 새마을’에서 박정희 정부가 만들려던 ‘새마을’을 냉전과 분단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새롭게 조명한다. 이제까지 새마을 건설을 농촌 개발·근대화 정책 차원에서 ‘새마을운동’을 중심으로 연구해왔던 학계와는 관점을 달리한다. 새마을 건설을 ‘동아시아-한반도-한국사회’라는 공간에서 193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냉전의 맥락에서 분석한다.
이에 따르면 박정희 정부 시기에 진행된 농촌 재편 정책에는 근대화 이상의 목적이 있었다. 박정희 정부는 분단체제에서 지배체제의 안정을 유지하려는 목적에서 새마을을 건설하려 했다. 새마을은 곧 ‘냉전의 새마을’이었으며 대공요원과 대공조장, 대공조원을 주축으로 하는 감시체계가 꾸려졌다. 이장과 새마을지도자들이 대공요원을 겸직했다. 이것은 곧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서로를 감시하는 체제의 등장을 뜻한다.
원형은 만주국에서 등장…반공 도구로 확산
‘냉전의 새마을’ 구상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 원형은 1930년대 만주국 농촌 사회에서 처음 등장했다. 일본이 공산주의의 침투를 막아내던 과정에서 나타난 산물이다. 마을을 중심으로 감시체제를 도입하는 전략은 베트남전에서도 효과를 발휘했고 한국군 역시 여기서 경험을 쌓았다. 이러한 연쇄작용 끝에 한국에서 새마을 건설이 시작된 것이다.
저자는 당대에 출간된 방대한 문헌을 바탕으로 이러한 사실을 입증해 나간다. 최근에 나온 연구자료뿐만 아니라 정부가 발표한 정책 자료, 신문기사는 물론이고 각종 회고록, 종교단체 등에서 발간된 자료, 주월미군사령부 등 미군 관련 자료, 국방부 정훈국에서 내놓은 자료집까지 다양한 출처의 자료를 제시하면서 ‘냉전의 새마을’이 구상되고 만들어지고 작동한 흔적을 찾아낸다.
예컨대 저자는 미국은 안보 차원에서 농촌 재편 전략의 공유에 노력을 기울였다고 설명하면서 1950년대 미 해외공보처(USIA)가 현지 미 공보원에게 배포한 잡지 ‘자유세계’의 내용을 소개한다. 자유세계는 말라야와 필리핀, 베트남 등지에서 추진된 ‘냉전의 새마을’ 건설을 각국에 소개했고 한국어판도 마찬가지였다는 이야기다. “1953년 한국어판 자유세계는 말라야에서 영국 군정이 50만 명에 달하는 무허가 중국인 정주자를 재정착시키기 위해 벌인 신촌 건설을 대공투쟁의 대표적 성공사례로 제시했다. (중략) 자유세계는 신촌 유지의 핵심적인 기제가 마을 구성원의 연대책임에 기반한 감시체제라는 점을 알렸다.”
인권과 생명 위협하는 부작용 나타나
새마을 건설 과정에서는 널리 알려진 대로 농촌의 주거환경과 사회기반시설을 개선하는 한편, 소득을 높이는 작업이 추진됐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부작용도 함께 나타났다. ‘냉전의 새마을’은 구성원들이 서로를 감시하게 만드는 체제였던 만큼, 인권과 생명이 위협당하는 상황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국가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개인의 의식을 통제하고 개조하려드는 상황은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냉전의 새마을의 감시체계는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을 감시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당대에 경찰서들에서 작성된 문건들도 자료로 제시된다. 마을 주민들은 용의 사항을 신고해야 하는 책임을 졌고 대공요원이나 대공조장은 신고 내용을 경찰에 알려야 했다. 이 과정에서 ‘내부의 적’을 정하고 지배체제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언제든 ‘안보’를 이유로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체제가 완성됐다.
대표적으로 정신질환자는 마약중독자와 같이 분류돼 국가권력의 사찰을 받았다. 저자는 “박정희 정부가 외부의 적을 막는 감시체계뿐만 아니라 국가의 통치체계 또는 사회적 규율에서 일탈할 여지가 있는 지역사회 구성원들까지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하고 감시체계를 작동시켰음을 의미한다”고 밝힌다. 박정희 정부가 구축한 ‘1972년 분단국가체제’가 냉전의 새마을을 토대로 만들어진 “비인간화를 악화, 지속하는 체제”였다고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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