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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재밌는 걸 너희만 했다니"...골 때리는 여자들의 땀내 나는 우정

입력
2022.03.26 09:5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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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풋살 하는 여자들

편집자주

강소희 작가, 서효인 시인이 스포츠로 풀어내는 세상 이야기. 스포츠에 열광하는 두 필자의 시점에서 이 시대의 스포츠를 응원하고 지적합니다.

지난해 6월부터 방송된 SBS 예능 '골 때리는 그녀들'은 축구에 최선을 다하는 출연진들의 진정성 넘치는 경기로 주목받은 프로그램이다. SBS 제공

지난해 6월부터 방송된 SBS 예능 '골 때리는 그녀들'은 축구에 최선을 다하는 출연진들의 진정성 넘치는 경기로 주목받은 프로그램이다. SBS 제공

봄이다. 공영 풋살 코트가 붐빈다. 예약제로 운영되는 이곳은 저렴한 임대료로 언제나 인기가 많다. 지난 주말, 여자 풋살 모임을 위해 서울 마포구 망원유수지 체육공원 코트에 갔다가 특별한 경험을 했다. 우리가 입장할 때 코트에서 퇴장하는 이들이 여자들이었다. 실내 농구 코트나 풋살 코트에서 앞뒤 팀이 대부분 남자팀이어서 그 장면이 엄청나게 신선하고 반가웠다. 그날의 행운 같다고 여겨질 만큼. 그런데 우리 타임이 끝나고 퇴장할 때 입장하는 팀을 보니 또 여자들이었다. 뭐지, 이 운수 좋은 날은.

여자 축구계의 바이블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가 출간된 게 2018년 6월이다. 브라질 축구 스타 호나우두와 K리그 팬이었던 김혼비 작가가 직접 여자 축구팀에서 뛰게 되면서 경험한 것들을 생생하게 전하는 이 에세이는 단언컨대 대한민국의 수많은 여자들을 코트로 이끌었다. 왜냐면 축구 혹은 미니 축구인 풋살을 시작하는 여자들이 눈에 띄게 많아진 게 그 무렵이었으니까. 그중에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2018년 6월 출간된 김혼비 작가의 생활 체육 에세이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는 축구를 좋아하고, 직접 축구를 하는 것을 미치도록 좋아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민음사 제공

2018년 6월 출간된 김혼비 작가의 생활 체육 에세이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는 축구를 좋아하고, 직접 축구를 하는 것을 미치도록 좋아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민음사 제공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를 읽었을 때의 충격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순식간에 책에 빠져들고 전율하는 한편 ‘왜 나는 여태껏 축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지?’라는 충격에 사로잡혔던 그날 밤을. 한 번도 먹어본 적 없고 본 적도 없는 음식을 욕망하기는 어렵겠으나 그림책이나 TV에 나온 음식을 보며 ‘언젠가… 나도… 한 번쯤은…’ 하며 군침을 흘려 볼 순 있지 않은가. 운동을 좋아하는 편이라고 자부하던 나조차도 어째서 축구에 대해서는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걸까? 왜?

그전까지 나에게 축구란 어디선가 일어나는 지구촌 축제였고, 붉은 얼굴의 조기 축구회 아저씨들이었고, 여자들을 운동장 가장자리로 몰아내는 것이었다. 축구는 야구와 함께 생활 스포츠의 양대 산맥이면서도 여자들에게 관전석이 아닌 플레이어로서 자리를 내어준 적 없는 스포츠였다.

누군가 남자들이 의도적으로 여자들을 배제했냐고, 그게 우리 잘못이라도 되는 거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당신 개인의 의도는 아닐 수도 있겠죠. 사실 의도를 품고 말게 어딨겠어요. 남자들이야 축구하고 싶으면 주위 형 동생에게 물어보면 되잖아요? 아무 조기 축구회라도 찾아가면 되잖아요? 어릴 때부터 사방에서 공 차러 오라고 손짓을 하잖아요? 당신은 그 플로에 몸을 맡기든 말든 선택할 수 있었잖아요? 그런데 여자아이들은 당연한 손짓을 받아보기는커녕 운동장 가장자리로 끝없이 밀려났잖아요? 어린이 축구단에는 남자 어린이들이 훨씬 많잖아요? 그래도 축구가 좋다고 공을 차고 다니면 약간 유별난 여자애로 봤잖아요? 이게 남자들 탓이냐고요?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죠. 자기들이 가진 것에 대해 별다른 인식 없이 그냥 누리던 대로 누리는 걸 짧게 말하면 기득권이라고 하니까요"라고 느닷없이 랩으로 답하게 될 것만 같다. 뭐 정확히는 ‘가부장제’라고 해야 한다는 걸 나도 알고는 있다.

16일 서울 동작구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에서 진행된 체육 수업에서 한 여학생이 다른 학생들을 제치고 달리고 있다. 최주연 기자

16일 서울 동작구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에서 진행된 체육 수업에서 한 여학생이 다른 학생들을 제치고 달리고 있다. 최주연 기자

내가 이렇게 답하면 누군가는 꼭 이렇게 얘기하겠지. 조금 공격적인 것 같지 않냐고. 자기는 자라면서 딱히 그런 거 느껴본 적 없다고. 우리나라 정도면 남녀가 평등한 편이지 않냐고. 여자랑 남자랑 가르지 말고 좋게 좋게 어울려 살면 되지 않냐고. 좀 부드럽게 말하면 안 되냐고. 지금 화난 것 같다고. 혹시 페미니스트냐고.

정답! 페미입니다. 그런데 혹시 그쪽은 페미가 아니세요? 설마 여자와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지 못하시나요? 아, 동의하신다고요? 다행이네요. 그런데 그렇다면 그쪽도 페미가 맞는데?! 축구 얘기하다가 왜 페미니즘까지 들먹이냐고요? 이래서 우리나라 페미니즘이 잘못되었다고요? 저런, 우리가 사는 2022년 대한민국은 아직도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지 않았고, 남녀 소득 격차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바닥을 깔고 있으며, 여성가족부를 없앤다는 공약이 다수의 20대 남성에게 지지받는 곳인데요? 이것 말고도 ‘여자라서’ 당하는 불평등, 폭력, 죽음 등이 너무 많은데요? 생활 체육이라고 뭐 크게 다르겠어요? 우린 기억해야 해요. 여자 축구에는 ‘여자’가 붙어 있다는 것을. 그것만으로도 여자와 남자의 생활 체육 환경은 크게 다르다는 것을. 큰 틀에서 보면 다 관통하는 얘기고 전혀 다른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하여간 우아하고 호쾌한 충격에 대한 얘기로 돌아가자면, 온 인생을 축구 관전자의 입장만을 고수해온 내게 김혼비 작가의 이야기는 전시 중의 전서구처럼 놀라운 소식이었다. 어딘가에는 축구하는 여자들이 있는 데다, 생각보다 많은 여자들이 축구에 미쳐 있다고. 뒤늦게 민족 해방의 길을 전해 들은 이불 속 독립 열사처럼 나는 분연히 일어나 생활 축구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신설된 풋살팀에 들어갔다. 축구화와 풋살화가 다르다는 것도 모른 채로. 그곳에는 나 같은 여자들이 한 트럭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마침내 만났고, 운동장 한가운데를 차지하게 되었다. 2018년 9월이었다.

강소희 작가가 속한 풋살팀. 서울 마포구 망원유수지 체육공원을 중심으로 모여 연습하고 있다. 강소희 제공

강소희 작가가 속한 풋살팀. 서울 마포구 망원유수지 체육공원을 중심으로 모여 연습하고 있다. 강소희 제공

그리고 아시다시피 2022년 3월이 되었다. (많은 일이 있었다.) 그 사이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는 SBS 예능 '골 때리는 여자들'의 서문으로 인용되었고, 드디어 운동장을 독차지한 여자들의 고 자극 플레이를 생생하게 지켜본 수많은 여자들이 너도나도 'FC 어쩌구'를 만들어 운동장으로 물밀 듯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하여 우리는 망원유수지 체육공원 풋살 코트 철문에서 조우하게 된 것이다. 딱히 말을 걸지 않아도 조금은 길게 서로에게 철문을 잡아주며 우호적인 에너지를 주고받는 것이다. 땀에 전 채 조용히 미소 지으며 집으로 돌아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오늘 앞뒤 팀이 모두 여자 팀이었음. 대박 좋음’ 같은 걸 올리게 된 것이다. 다음에 또 만나면 팀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자고 마음먹게 되는 것이다.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불쑥 커지는 것이다. 당신은 어떻게 여기까지 왔으며 이 운동의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매료시키는가를 포함한 500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어지는 것이다.


SBS '골 때리는 그녀들' 영상 캡처

SBS '골 때리는 그녀들' 영상 캡처


우리는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크게 궁금해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풋살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아주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경험적 통계에 따르면, 내 주위 풋살러들은 풋살에 대해서라면 이야기하고 듣기 위해서 전지훈련이라도 떠날 사람들이다. 이는 내가 속한 풋살팀 단체채팅방에 "이 운동이 뭐가 그렇게 좋아요?"라는 골자의 질문에 '축구 양말'발로 달려 나와 자기 얘기를 들려주는 팀원들로 증명된다.

스포츠를 경험해본 적은 없지만 스포츠 만화에는 열광해서 ‘들끓는 연대와 우정’ 같은 팀 스포츠 판타지를 가지고 있던 '양다'는 민우회에서 만난 지인의 소개로 풋살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풋살 후기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 좋은 걸 이제야?"가 된다. 그는 풋살의 10가지 좋은 점에 대한 글을 정리해 열성적으로 풋살을 전도하는 중이다.

그중 유년기 스포츠에 대한 보상이 인상적이다. 어릴 때 여자는 흉터가 생기면 안 되고, 땀내 나면 안 되고, 피부가 타며 안 된다는 류의 사회적 편견 때문에 격렬한 스포츠를 경험할 수 없었던 그는 풋살을 하면서 몸을 적극적으로 쓰고 다치기도 하면서 자신의 몸을 어떻게 보호하고 관리해야 하는지, 몸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대화를 통해서만 쌓아 왔던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다양한 연령대와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땀 흘리는 우정과 사랑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이 너무 좋다고 이야기한다. 머리의 대화가 아닌 몸의 대화라고나 할까. 부딪치고 뒹굴고 일으켜 주며 쌓아 가는 관계는 지금껏 우리가 맺어 왔던 것과는 다른 형태와 냄새로 우리의 세계를 단숨에 확장해 주는 것이다.

서울 마포구 망원유수지 체육공원에 모여 경기하고 있는 여자 풋살팀. 강소희 제공

서울 마포구 망원유수지 체육공원에 모여 경기하고 있는 여자 풋살팀. 강소희 제공

고등학교 2학년 때 패션 아이템으로 아디다스 올드 축구화를 신고 다니면서도 막상 공을 차볼 생각을 해보지 못한 게 웃기고 억울하다는 '은선'. 그는 20대 때 여자 축구팀을 알아본 적도 있지만 여자 축구 교실의 수가 너무 적었고 시간대마저 평일 오전이라 수업 시간과 겹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풋살을 시작한 그는 "아니 이 재밌는 걸 너희만?"이라는, 팀 스포츠를 처음 하는 여자들이 느끼는 감정의 전철을 밟고 있다. 은선은 심장이 터질 듯한 경험, 공 하나에만 집중하는 짜릿함, 운동 후의 고양된 상태가 주는 매력과 더불어 "이기고 지는 경험을 하는 것도 좋다"고 말한다. 여학생들에게 특히 터부시되던 '갈등 상황’이 팀 스포츠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갈무리되는 걸 보면서 ‘갈등=관계가 망함’이 아니라 충분히 회복될 수 있다는 걸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운동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에세이 '내일은 체력왕'의 저자인 강소희(오른쪽), 이아리. '여가여배(여자가 가르치고 여자가 배운다)' 프로젝트에서 축구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여가여배'는 여성이 주체가 되어 다양한 종목을 가르치고 배우며 경험을 공유하는 비정기 원데이 클래스다. 강소희 제공

운동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에세이 '내일은 체력왕'의 저자인 강소희(오른쪽), 이아리. '여가여배(여자가 가르치고 여자가 배운다)' 프로젝트에서 축구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여가여배'는 여성이 주체가 되어 다양한 종목을 가르치고 배우며 경험을 공유하는 비정기 원데이 클래스다. 강소희 제공

봄이다. 공영 풋살 코트에 여자들이 붐빈다. 묵은 편견을 뚫고 이제서야 몸을 쓰는 기쁨을 알아가는 여자들이. 이제라도 알게 된 게 어디냐고 서로를 위안하는 여자들이.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서로의 문을 열어주는 여자들이.

강소희 작가·카피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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