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커상 후보 ‘대도시의 사랑법’ ‘저주 토끼’
두 편 모두 옮긴 번역가 안톤 허 인터뷰
지난 10일 노벨 문학상,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로 꼽히는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1차 후보(롱리스트)에 국내 작가의 작품 두 편이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2016년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한국 작품 최초로 해당 부문에서 수상한 지 6년 만의 낭보다. 부커상 후보에만 올라도 영어권 독자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만큼 후보작에 선정된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의 사랑법’과 정보라 작가의 ‘저주 토끼’에 축하가 쏟아졌다.
그런데 장르도, 독자층도, 국내 인지도도 제각각인 두 작가의 전혀 다른 작품이 어떻게 함께 후보에 오를 수 있었을까? 비밀은 두 작품을 모두 번역한 안톤 허(41·한국이름 허정범)에 있다.
부커상 인터내셔널은 영어로 번역된 소설을 대상으로 선정하며 상금 5만 파운드 역시 원작자와 번역가에게 분배된다. 그만큼 번역가의 역량이 절대적인 상이다. 안톤 허는 올해 1차 후보작 13편 중 두 편의 번역작품에 이름을 올린 유일한 번역가이기도 하다.
지난 16일 한국일보사에서 만난 안톤 허는 “후보 지명 소식을 들었을 때 코로나 투병 중이었는데, 처음 ‘저주 토끼’ 출판사로부터 연락이 왔을 땐 내가 지금 환각 상태인가 싶었고, 15분 뒤 ‘대도시의 사랑법’ 출판사로부터 연락이 또 오자 누군가 장난치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며 웃었다. 공교롭게도 2차 후보(쇼트리스트) 발표날인 4월 7일은 그의 생일이기도 하다.
‘안톤 허’라는 번역명을 사용하고 있어 한국계 외국인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한국에서 초·중·고·대를 모두 다닌 한국인이다. 스웨덴에서 태어났고 코트라 해외 주재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홍콩, 에티오피아, 태국과 한국을 오가며 살았다.
“어릴 때부터 문학이 하고 싶었는데 집안의 반대로 고려대 법학과에 진학했어요. 문학의 꿈이 접어지지 않아 서울대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를 했죠.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통번역 프리랜서 일을 했고 2018년 신경숙 작가의 ‘리진’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문학 번역을 시작했어요.”
‘리진’ 이후 강경애의 ‘지하촌’, 황석영의 ‘수인’ 그리고 이번 '저주 토끼’와 ‘대도시의 사랑법’까지 총 5권의 단행본을 번역했다. 그중 두 권이 부커상 후보에 올랐으니 5년 차 번역가로서는 엄청난 타율이다. 안톤 허는 “여러 경로를 통해 해외 출판사, 에이전시, 독자들과 활발하게 소통했던 것이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사실 번역 자체는 번역가 일의 40%밖에 안돼요. 번역할 작품을 고르고, 국내 출판사로부터 번역권을 따내고, 번역 이후엔 현지 에이전시와 출판사에 작품을 소개하고 이후 홍보하는 역할까지 모두 번역가의 일이에요.”
‘저주 토끼’와 ‘대도시의 사랑법’ 역시 전적으로 안톤 허가 총대를 메고 해외에 수출한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주 토끼’는 2018년 와우북페스티벌에 구경 갔다 접한 작품으로, 잠깐 서서 읽었는데도 너무 아름다웠어요. 그래서 다짜고짜 출판사에 작가님을 만나볼 수 있냐고, 번역을 하고 싶다고 했죠. 박상영 작가는 전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로 인연을 맺었어요. 그 작품이 처음 발표됐을 때 작가에게 직접 허락을 구해 번역을 했고, 해외 한 온라인 문학 웹진에 투고했는데 그 사이트에서 가장 많이 읽힌 작품이 됐죠. ‘채식주의자’의 번역가인 데버라 스미스가 차린 틸티드 액시드 출판사가 그걸 보고 관심을 가져 ‘대도시의 사랑법’ 출간까지 이어진 거예요.”
‘저주 토끼’는 장르 소설이고 ‘대도시의 사랑법’은 퀴어 소설이다. 안톤 허는 “번역가로서 주류에서 벗어난 문학을 선보이고 싶은 욕심이 있다”며 “그래서 이 두 작품으로 후보에 오른 것이 더욱 기뻤다”고 했다. “좀 더 소수자 중심으로, 좀 더 변두리에 있는 이야기들로 한국 문학 번역의 흐름을 바꿔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문학 번역에 임하려고 해요.”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데버라 스미스가 영국인이고 2019년 마찬가지로 1차 후보에 올랐던 황석영 작가의 ‘해질 무렵’의 번역가 소라 김 러셀이 한국계 미국인이었던 것과 달리 안톤 허는 한국 국적의 번역가다. 그렇기에 이번 후보 지명은 한국 문학 번역계의 쾌거라고도 할 수 있다. 정작 그는 “한국 문학 번역 환경이 너무 척박하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전업 한영 번역가는 저를 포함해 3명밖에 안돼요. 시장이 워낙 작기 때문이죠. 한 해 통틀어 영문 번역되는 한국 문학은 열 편 남짓이에요. 전업 번역가가 늘 수가 없는 구조예요. '채식주의자’의 부커상 수상 이후 해외에서 한국 문학의 위상이 많이 높아졌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처참해요. 2011년 번역된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 이후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에 한국 문학이 하나도 없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그래서 이번 부커상 후보 지명이 더욱 의미가 커요.”
그런 척박한 시장을 개척해온 번역가로서 안톤 허의 자부심은 남다르다. 번역가로서의 꿈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우리 번역 문학의 미래를 생각한다”는 우문현답이 돌아왔다. “저는 한국 문학이 너무 좋아요. 한국 문학 독자로서 특권이 있다고 생각하고, 이 특권을 세상과 나누고 싶어서 번역가가 된 것 같아요. 번역가로서 저는 남들이 보지 못한, 앞으로 남들이 보게 될 풍경을 미리 보고 있어요. 한국 문학의 미래에 참여하고 기여하는 것. 그게 제 꿈이에요. 부커상 수상이요? 그건 생각 안 할래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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