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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슬픔이'는…슈베르트·임동혁의 위로와 공감

입력
2022.03.23 04:3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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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20여 년간 공연 기획과 음악에 대한 글쓰기를 해 온 이지영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이 클래식 음악 무대 옆에서의 경험과 무대 밑에서 느꼈던 감정을 독자 여러분에게 친구처럼 편안하게 전합니다.

이달 15일 슈베르트 소나타 앨범 발매 기념 기자간담회를 열었던 피아니스트 임동혁이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 코리아타임스 최원석 기자

이달 15일 슈베르트 소나타 앨범 발매 기념 기자간담회를 열었던 피아니스트 임동혁이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 코리아타임스 최원석 기자

디즈니 픽사가 제작한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은 부정적 기억과 어두운 감정을 건강하게 다루는 법을 유쾌하고 감동적으로 그린 멋진 심리극이다. 주인공 라일리의 어린시절 장난감인 꼬마 자동차 '빙봉'은 라일리가 성장하면서 그의 기억 속에서 자신이 사라져가자 한없이 우울해한다. 펑펑 울면서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모르는 빙봉을 일으켜 세운 것은, 즐거운 생각을 갖도록 적극 독려한 감정 캐릭터인 '기쁨이'가 아니라 빙봉의 얘기를 들어주며 함께 슬퍼했던 '슬픔이'였다. 평소 존재감 없고, 다소 둔해 보이고, 어두워 보여 '라일라의 중심 감정에서 배제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캐릭터의 반전이다. 슬픔이의 공감 덕에 빙봉은 좋은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된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때 기쁨이 얼굴 표정은 이 영화가 뭘 말하고 싶었는지 보여줬다.

슈베르트는 슬픔이 같은 존재였을 것 같다. 내성적이고 소심했던 작곡가는, 다행히 그의 여린 마음과 재능을 알아보고 작은 음악회를 열어준 친구들 덕분에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다. 슈베르트의 음악은 작곡가의 성격과 닮았다. 밝고 화려하고 기운이 넘쳐 듣자마자 귀를 사로잡는 타입이 아니라 머뭇거리고, 느릿하고, 했던 말 다시 꺼내 반복하다보니 다소 둔해 보인다. 미처 전하지 못한 마음과 이야기를 그의 음악에 꾹꾹 담아낸 덕일까. 말 못 할 상황을 겪고 있는 누군가에게 슈베르트의 음악은 "나도 알아"라고 말을 건넨다. 슬픔이가 빙봉을 위로했던 것처럼, 슈베르트 음악은 조용히 곁에 머물면서 움켜쥐고 있던 약하고 어둡고 힘든 감정을 건드린다. 먹먹함이 차올라 눈물이라도 쏟게 되면 다행이다. 덕분에 상처는 깨끗하게 씻겨나간다. 그래서 슈베르트의 음악은 어둡고 슬픈 듯하지만 결국 한없이 맑게 느껴진다.

슈베르트의 생애 마지막 해에 쓴 소나타 20번(D.959), 21번(D.960) 두 곡을 특별히 아낀다. 세계적인 명반도 있고, 이 곡과 깊은 인연을 맺어준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의 실연도 특별하지만, 꽤 오랫동안 피아니스트 임동혁이 이 곡을 연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몇 년 전, 예술의전당 공연 중 앙코르로 D.959 세 개의 악장을 연주해 언젠간 앨범으로도 만날 수 있겠구나 바랐는데, 얼마 전 20번, 21번 소나타를 담은 앨범을 내놓았다. 느릿한 템포, 담담하게 읊조린 목소리, 그의 연주를 기록으로 남길 수 있어 다행이고, 슈베르트를 연주하게 될 5월 무대는 얼마나 좋을까 싶다.

임동혁 6집 슈베르트 소나타 앨범 표지. 워너클래식 제공

임동혁 6집 슈베르트 소나타 앨범 표지. 워너클래식 제공

임동혁은 얼마 전, 한 방송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이 "불행했다"고 말했다. 2001년 12월, 롱티보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한 후의 화려한 이력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그는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든든한 지지를 얻는 연주자, 세계적인 음반사 EMI(현 워너클래식)를 통해 앨범을 발매할 때마다 그라모폰, BBC 뮤직, 르 몽드 라 무지크와 같은 음악전문지의 호평을 받아온 최고의 스타 연주자다. 그런데 왜 불행하다 말했을까.

오랫동안 그를 지켜본 팬들은 잘 알겠지만, 세계 음악시장에 처음 문을 두드리던 시절의 임동혁은 매우 어렸고, 음악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도 많았다. 그래서 지금도 불행할까? 롱티보 콩쿠르 우승 후 20년이 지나는 동안 그는, 타고난 재능만으로 무대에 서는 연주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했다. 연주 때마다 심하게 긴장한 탓에 복통을 일으킨 순간도 허다하고, 불행하다고 말했던 환경 때문에 멘털이 흔들렸을 법한 순간도 꽤 많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의 연주는 언제나 훌륭했다. 지금도 무대를 앞두고 금세 어떻게 될 것처럼 바들바들 떨면서 겨우 발걸음을 떼지만, 고맙게도 임동혁은 그 불완전함을 항상 이겨냈다.

어쩌면, 그가 미디어 앞에서 "어린 시절은 불행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자신을 힘들게 했던 시간에 더 이상 함몰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불편했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게 되기까지, 그 시절의 자신과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보게 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지났을까. 임동혁에게 모든 것을 토해내고 포용하게 만든 '슬픔이'는 무엇이었을까.

음악은 음악을 듣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위로하고 감동을 주지만, 그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 먼저, 더 많은 시간을 치열하게 싸워낸 연주자에게도 위로와 감동이 된다. 이 시기에 남긴 임동혁의 슈베르트 음악이 더욱 납득이 되는 이유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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