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모진 삶 다룬 드라마 '파친코'
원작 소설과 비교해보니...질긴 생명력 더욱 생생
애플이 제작... 한국계 창작자들이 정신 살려
미국 자본 드라마에 한(恨)과 정(情) 부각된 배경
25일 'OTT 대첩'
넷플릭스 '브리저튼' 시즌2 공개
북미 최대 연예 기획사 윌리엄모리스엔데버(WME)에서 아시아계 최초로 파트너 자격으로 일한 테레사 강 로우는 2017년 소설 '파친코'를 읽고 일종의 '전격'(電擊)을 경험했다.
"비행기서 읽고 눈물 펑펑" 드라마 제작의 출발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 일본으로 건너가 1980년대까지 모진 삶을 산 조선인 4대의 이야기가 재일동포뿐 아니라 강 로우처럼 이방인으로 사는 세계 이민자들의 애처로운 삶이 떠오른 데 따른, 공감의 격한 떨림이었다. 강 로우는 미국에서 비디오 대여점을 운영하는 한국인 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런 그녀는 '파친코'의 드라마 기획에 욕심을 냈고, 바로 수 휴에게 책을 보냈다. 한국에서 태어난 뒤 1년이 채 안 돼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온 '동병상련'의 제작자였다. 수 휴는 미국 드라마 '더 테러'(2018) 편집을 막 마치고 비행기에서 지친 몸으로 소설을 읽다 눈물을 쏟았고, 드라마 제작에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미국 드라마에 나온 '쌀밥'의 숭고함
이렇게 제작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애플티비플러스 드라마 '파친코'가 25일 공개된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정식 공개에 앞서 각국 취재진에게 미리 공개된 총 8회의 영상을 보면, 드라마는 책의 이 강렬한 첫 줄에 담긴 정신을 이어 받아 재일동포의 질긴 생명력을 돋우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곧추세운다. 소설에서 선자의 어머니 양진은 곡물 장사꾼에게 쌀을 팔아달라고 구걸한다. 임신한 채 일본으로 떠나야 하는 딸에게 고향에서 난 쌀밥 한 그릇을 든든히 먹여보내고 싶은 모정이다. 일제강점기, 우리 땅에서 자란 쌀은 한국인에게 '금기'였다. 좋은 식량은 모두 일본인의 것이었다. 카메라는 양진이 어렵게 구한 쌀을 골라 한 톨도 흘려 보내지 않게 조심스럽게 헹구고, 가마솥에 안치는 과정을 빠트림 없이 가득 담는다. 빼앗긴 쌀은 조선인의 혼이다. 정신을 되찾는 순간, 뽀얗게 익은 쌀밥을 비춘 화면엔 찬송이 흐른다. 화상으로 만난 수 휴 총괄 프로듀서는 "식민의 시대, 내 땅에서 난 쌀로 밥을 짓는 행위가 얼마나 신성한 행위였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재일동포 여성 육성 담겨... 현실이 된 픽션
드라마는 재일동포의 한을 적극적으로 풀어준다. 일본으로 이주해 50여 년 동안 산전수전을 겪은 나이 든 선자는 아들과 함께 부산 영도를 찾는다. 어려서 물질을 하기 위해 맨몸으로 뛰어들었던,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그곳이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체류 중인 윤여정은 "내가 선자라도 아들하고 진짜 한 번 그 바다를 찾고 싶었을 것 같다"며 "비를 쫄딱 맞으면서 촬영했고 책에 없는 내용이었지만, 정말 찍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말했다.
시간순으로 진행된 소설과 달리 드라마는 각기 다른 시대를 교차 편집했다. 이 과정을 통해 나라 잃은 유랑의 후예들의 아픔은 현재진행형이 된다. "핏방울 하나하나가 못하게 막는다면." 극 중 노파가 한 드라마의 기둥 같은 이 말은 재일동포의 존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제작진은 2021년 일본에 사는 104세 재일동포 등 여러 여성의 육성을 실었다. 픽션은 그렇게 다큐멘터리가 되고, 현실성을 얻는다. 수 휴 총괄프로듀서는 "재일동포의 삶은 역사책에 쓰이지 않는다"며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담고 싶었고 그때 '이렇게 (세상이) 내 삶에 관심 있을 줄 몰랐다'는 재일동포 할머니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누군가를 완벽히 닮기 위해선 상처까지 빠트려선 안 되는 법. 드라마에서 선자의 손자인 솔로몬 백(진하)은 한국어, 일본어, 영어 등 세 개 언어로 말한다. 훈장이 아닌, 식민의 뼈아픈 흔적을 다개국어로 표현한 드라마적 장치다. 한국계 미국인인 진하는 "3개 국어를 하는 게 엄청 어려웠지만, 그게 바로 인물의 정체성"이라며 "재일동포 커뮤니티를 위해서 그 정도의 노력은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진하는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아버지에게 직접 일본어 대사를 보내고, 아버지가 녹음해 보낸 음성 파일을 들으며 일본어를 외웠다고 한다.
100% 미국 자본으로 만들어진 드라마엔 재일동포의 100여 년의 한과 역사가 오롯이 담겼다. 각본(수 휴), 연출(코고나다, 저스틴 전), 총괄 프로듀서(테레사 강 로우)를 비롯해 출연 배우들이 한국계로 대부분 채워진 결과다.
"전 세계 이민자에 보내는 러브레터" 애플·넷플릭스 '0TT 대첩'
'파친코'엔 한류 스타 이민호(수산업자 고한수)와 신예 김민하(젊은 선자)를 비롯해 미국, 일본 등 국적이 다른 3개국의 배우들이 나온다. 한항구 등 20여 명의 역사학자가 드라마에 자문으로 참여했다. 부산 등 한국 7개 도시와 캐나다, 일본 등에서 촬영이 이뤄졌고, 300여 명의 제작진이 투입됐다. 추정되는 총 제작비는 800억 원. 1923년 관동대지진 등이 실감 나게 재현되는 데 쓰였다.
외신의 반응은 일단 호의적이다. 미국 방송영화 비평사이트 로튼토마토에서 '파친코'는 20일 기준 신선도 100%를 기록 중이다. "'파친코'는 가족의 회복력과 여성의 힘에 대한 유쾌한 이야기와 균형을 이루는 고통의 비참한 초상화"(할리우드리포터), "세상의 이민자들에게 보내는 러브레터"(어워즈와치)란 호평이 잇따랐다. 흥행의 복병은 같은 날 공개될 넷플릭스 '브리저튼' 시즌2다. '브리저튼'은 '오징어게임'(2021) 공개 전 넷플릭스에서 역대 가장 인기를 끈 드라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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