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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선 인격장애 앓는 화가 "아픔은 상처 아닌 또 다른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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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선 인격장애 앓는 화가 "아픔은 상처 아닌 또 다른 가능성"

입력
2022.03.22 04:30
수정
2022.03.22 13:23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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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전 '그리고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스페이스K 서울에서 5월 18일까지

이근민 작가가 자신의 개인전 '그리고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가 열리고 있는 서울 강서구 스페이스K 서울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스페이스K 제공

이근민 작가가 자신의 개인전 '그리고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가 열리고 있는 서울 강서구 스페이스K 서울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스페이스K 제공

화가 이근민(40)은 낯선 알파벳과 숫자의 조합으로 자신이 '정의'되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경계선 인격장애라는 질환을 편의상 구분짓기 위한 질병분류코드였다. 2001년 서울대 미대 1학년 재학 당시 일이다. 그는 "의사로부터 내 상태에 대한 아무런 설명 없이 진단코드만 들었고, 병명도 내가 (나중에) 찾아서 알게 됐다"며 "분위기가 되게 강압적으로 느껴졌고, 누군가 나를 정의하고, 데이터화한다는 게 폭력적으로 다가왔다"고 떠올렸다. 그때 받아든 진단서를 모티프 삼아 그린 게 '설계도'라는 제목의 작품이다. 그의 개인전 '그리고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가 열리고 있는 서울 강서구 스페이스K 서울에서 볼 수 있다.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당시 느꼈던 반발심이 작업을 부추기게 하는 동력이 됐다"며 "오히려 아픔이 내 예술관에 많은 변화를 줬다"고 했다. 질환의 징후가 처음 나타난 건 그가 초등학생 때였다. 시체 썩는 냄새를 맡거나 구토가 나 음식물을 먹을 수 없을 정도였지만 지방의 작은 병원에선 원인을 찾지 못했다. 대학 진학 후 병세가 심해졌다. 3개월가량 병동 신세를 졌다. "인간의 장기나 신체 같은 생명체가 해체되는 이미지의 환시가 나타났어요. 인간의 어떤 부위이지 않을까 짐작되는 것들이 층층이 겹쳐 보였죠. 의사한테 말하면 입원을 더 하게 될까 두려워 숨겼어요."


'그리고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전시장 전경. 스페이스K 제공

'그리고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전시장 전경. 스페이스K 제공

그리고 눈앞의 환각은 화폭으로 옮겨갔다. 계획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무의식에 떠오르는 것을 그리는 게 그의 작법이다. 작가는 "정물화 그리듯 보고 그릴 정도로 구체적이고 정리된 감각은 아니었다"면서도 "그 기억의 자국과 냄새가 머릿속에 강하게 남아 그림의 소재로 활용하게 됐다"고 했다. 내성적인 모범생으로 살아온 한 화가 지망생이 조금은 특별한 예술가로 나아가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만의 병리적 경험이 담긴 작품들은 독창적이고 아름답다. 추하고, 괴기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멀다.

전시작은 최근 8개월 내 그린 신작(회화 21점, 드로잉 6점)이 주를 이룬다. 6점의 드로잉만 2015년 작품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뿐 아니라 외부 활동 일체를 중단하고, 오로지 작업에만 매달린 결과다. 특히 가로 폭이 10m에 이르는 대작 '문제구름'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상처의 말들이 쌓이고, 자꾸 자라나 구름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 같은 형상이 마치 작가의 자화상처럼 느껴진다. '다친 바보', '피해망상의 배열', '엉켜버린 기억' 등 작품도 같은 맥락이다. "시스템을 무조건 부정하는 건 아니에요. 다만 인간이 그러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정의되고, 데이터로 교환된다는 데 대한 자각은 있었으면 합니다."


가로 폭만 10m에 달하는 대작 '문제구름'. 스페이스K 제공

가로 폭만 10m에 달하는 대작 '문제구름'. 스페이스K 제공

그는 "작가의 의도를 떠나 (관람자가) 쾌든 불쾌든 작품을 보고 느끼는 게 제일 중요한 만큼 열린 마음으로 봐줬으면 한다"고 전했다. "아픔이 상처로 그치지 않고, 가능성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요. 저 같은 소수자를 대변하는 작가가 있다는 것도요."

전시 제목은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는 이성복이 쓴 시 '그날'의 마지막 구절에서 따왔다. 전시는 5월 18일까지.



권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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