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게 일제강점기는 필연적 사건이었다. 전근대적 세계관를 신봉하고 그것이 만들어 낸 질서에 안주했던 국가는 급변하는 세계 정세에 대응하지 못했다. 외교뿐만 아니라 내치에서도 자주성을 잃었다. 근대의 흐름에서 낙오된 국가는 우월한 국가의 침략과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한반도 지배는 당연한 결과였다고 설명하는 이러한 주장은 오랫동안 학술적 근거를 갖춘 ‘통설’로 여겨졌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의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제가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학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역사관인 ‘식민사관’이 남긴 유산이었다. 이를 반박하고 한국사를 새롭게 쓰는 작업은 1960년대에 들어서야 시작됐다.
일제의 식민지배와 전쟁 범죄를 축소하거나 정당화하는 작업이 현재도 진행 중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일본의 극우와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이 언론을 통해서 국내에 소개되고, 여론이 들끓는 현상이 반복돼 왔다. 그럼에도 역사 왜곡의 밑바탕이 된 식민사관을 누가, 왜, 언제, 어떻게 만들어 냈는지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등 국내 역사학자 7명이 참여해 최근 내놓은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전 8권)’는 그 점을 파고든다. 대학과 언론, 조선총독부와 조선사편수회를 비롯해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조사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와 일본에서 식민사관 세우기에 어떠한 조직들이 참여했고, 무슨 역할을 했는지 추적한다.
포문은 역사학계 원로인 이태진 교수가 열었다. 총서의 첫 권인 ‘일본제국의 ‘동양사’ 개발과 천황제 파시즘’은 오늘날 널리 쓰이는 '동양'과 '동양사'라는 용어가 일제가 19세기에 만들어 내고 적극적으로 활용한 용어라는 점을 밝힌다. 일제가 규정한 ‘동양’은 유럽인들의 인식하던 동양(Orient·근동 또는 중동)이 아니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일제에게 동양은 “서양 열강에 앞서 일본제국이 주변국을 선점한 세계는 곧 일본제국의 천황이 다스리는 세계”였으며 “이 세계를 개척하는 데 필요한 역사연구와 교육을 위해 ‘동양사’란 영역을 새로이 설정, 개발"했다.
실제로 문부성은 1902년 말부터 중등학교 역사교과서를 일본사와 서양사 그리고 동양사로 나눠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동양사는 중국사와 주변 나라들을 다룬다. 그런데 여기서 한국사(조선사)는 동양사가 아닌 일본사에 포함돼 있었다. 이 교수는 동양사 개발에 중심적 역할을 했던 도쿄제국대학과 교토제국대학의 학제 변화부터 1902년부터 1920년대 사이에 출간된 역사교과서 30여 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료를 조사한 결과를 설명한다. “일본으로부터 이탈한 한국은 (중략) 야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제국 일본이 이를 바로잡아 문명의 혜택을 받게 해야 하며, 따라서 한반도를 차지하는 것은 제국 신민의 사명으로 여기도록 가르치고자 했다.”
총서는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직들로 논의의 범위를 넓힌다. 오영찬 이화여대 사회교육과 교수는 2권 ‘조선총독부박물관과 식민주의’에서 1915년 경북궁 안에 개관했던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역사를 소개한다.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조선에서 문화재를 발굴하고 보호하고 보전하고 전시했던 과정을 소개하면서 박물관이란 조직과 공간이 식민지배 이데올로기 생산에 동원됐다는 사실을 밝힌다. 조선의 ‘고유문화’를 인정했던 당대의 연구마저 ‘조선 문화는 북방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강조해 최종적으로 조선 문화의 타율성을 부각했다는 점도 드러난다.
총서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조사부(4권)부터 외무성 산하의 동방문화학원(8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넘나든다. 조선총독부 중추원과 조선사편수회(5권) 경성제국대학(6권) 만선사(3권) 일제의 남진과 대동아공영권(7권) 도쿄·교토제국대학과 두 제국대학의 동양문화·인문과학연구소(8권)도 연구 대상이다. 이 교수는 1권 종결부에서 “무엇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유일한 동아시아 국가란 ‘신화’가 깨져야 한다”면서 침략과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주장들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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