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둘 이상이 함께 쓴 '공저 에세이' 열풍

'우리 둘이었던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요?'는 이름이 같은 임지은 시인(왼쪽)과 임지은 작가가 함께 쓴 에세이다. 언유주얼 제공
‘지은이: 임지은, 임지은’
인쇄 오류라거나 중복 입력이 아니다. 최근 출간된 책 ‘우리 둘이었던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요?’는 이름이 같은 두 명의 임지은이 함께 낸 책이다. 시집 ‘무구함과 소보로’ ‘때때로 캥거루’를 쓴 임지은 시인과 수필집 ‘연중무휴의 사랑’을 쓴 임지은 작가가 공저자로 참여했다.
‘이름이 같은 시인과 작가의 일상과 대화’라는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 책은 애초에 이름이 같은 두 명의 임지은이 함께 책을 쓴다는 발상 아래 기획됐다. 2019년 잡지 언유주얼 4호에 실릴 원고의 교정지를 편집자가 실수로 작가 임지은이 아닌 시인 임지은에게 보냈고, 시인 임지은은 메일이 주인을 찾아가길 바란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의도치 않게 두 임지은을 엮어버린 편집부가 공저를 제안하면서 책이 탄생하게 됐다.

'밥을 먹다가 생각이 났어'는 배우 손수현과 뮤지션 신승은이 함께 쓴 비거니즘 에세이다. 열린책들 제공
우연한 실수가 바탕이 됐지만, ‘두 임지은 공저’는 최근 출판 업계 트렌드 중 하나로 자리 잡은 ‘공저 에세이' 유행의 연장에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 저자들이 함께 쓰는 에세이 출간이 부쩍 늘었다.
‘우리 둘이었던…’처럼 책의 기획에 맞춰 두 저자가 섭외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기존의 친분이 공저로 이끈다. 최근 출간된 비거니즘 에세이 ‘밥을 먹다가 생각이 났어’는 가까운 친구 사이인 배우 손수현과 뮤지션 신승은이 번갈아 쓴 책이다. 평소 다가구 주택의 위아래에 모여 살며 밥을 나눠 먹는 두 사람은 먼저 책을 의뢰 받은 손수현이 출판사에 신승은과의 공저를 제안하면서 함께 책을 쓰게 됐다.

강소희ㆍ이아리 '내일은 체력왕', 황효진ㆍ윤이나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 강지혜ㆍ이영주 '우리는 서로에게 아름답고 잔인하지'
공저는 특히 책을 처음 쓰는 저자들에게 유용하다. 분량에 대한 부담뿐 아니라 심리적 부담 역시 반으로 덜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운동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에세이 ‘내일은 체력왕’을 이아리 작가와 함께 쓴 강소희 작가는 “분량 부담이 적어서 쉽게 응한 부분도 있지만, 스포츠처럼 ‘같이하는 데’서 오는 추동력이 있다”며 “혼자라면 책을 쓰는 게 엄두가 안 났을 것 같은데 둘 혹은 그 이상이라면 상대를 믿고 가는 데서 오는 힘이 있다”고 했다.
편지 형식으로 된 서간 에세이의 재조명 역시 공저 열풍에 한몫했다. 상대방에게 말을 건네는 서간 에세이는 단순히 각 챕터를 맡아 나눠 쓸 뿐인 편저보다 더욱 내밀한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있다. 윤이나 황효진의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는 콘텐츠팀 ‘헤이메이트’의 두 사람이 주고받은 스무 편의 편지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강지혜 이영주 시인이 함께 쓴 ‘우리는 서로에게 아름답고 잔인하지’ 역시 심리 상담을 받으면서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와 산문이 바탕이 됐다. ‘우리는 서로에게…’를 낸 아침달 출판사는 이 책을 시작으로 두 사람이 함께 쓰는 ‘교감 에세이’ 시리즈를 선보일 예정이다.

구달ㆍ이지수 '읽는 사이', 백세희ㆍ전아론 '나만큼 널 사랑할 인간은 없을 것 같아', 김효진ㆍ강지수 ‘노래하는 대로 살고 싶었지만’, 노지양ㆍ홍한별 '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
이외에도 에세이스트 구달과 번역가 이지수가 함께 쓴 독서 교환 에세이 ‘읽는 사이’, 각각 강아지와 고양이를 기르는 백세희 전아론 두 작가가 자신들의 반려동물들에 대해 쓴 ‘나만큼 널 사랑할 인간은 없을 것 같아’, 라디오PD 공채 스터디에서 만났다가 훗날 프리랜서 PD와 경제신문 기자가 된 김효진 강지수의 ‘노래하는 대로 살고 싶었지만’, 노지양 홍한별 번역가가 함께 쓴 ‘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 뮤지션 이랑과 슬릭의 '괄호가 많은 편지' 등 다양한 여성 공저 에세이들이 출간됐거나 출간 예정에 있다.
이 같은 여성 공저 에세이 출간은 ‘워맨스’ 열풍의 연장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여성(woman)’과 ‘로맨스(romance)’의 합성어로 여성들의 친밀한 우정과 연대를 다룬 서사를 뜻하는 '워맨스'는 최근 콘텐츠 업계의 핵심으로 떠오른 키워드다. 예능 ‘스트릿 우먼 파이터’, ‘골 때리는 그녀들’, 드라마 ‘술꾼도시여자들’, ‘서른, 아홉’ 등 방송가의 워맨스 바람이 출판계에도 상륙한 것이다.

김하나 황선우 작가가 쓴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2019)는 5만 부 이상 팔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앞서 2019년 출간돼 5만 부 이상 팔린 김하나 황선우의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등의 흥행이 후발주자들을 견인하기도 했다. ‘밥을 먹다가 생각이 났어’를 만든 열린책들의 최고라 편집자는 “주요 도서 구매층이 2030 여성들이다 보니 이들이 선호하는 여성 저자들의 공저 에세이가 꾸준히 주목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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