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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가 되길 거부한 그녀, 영국 왕실의 ‘노라’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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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가 되길 거부한 그녀, 영국 왕실의 ‘노라’였을까

입력
2022.03.14 04:3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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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개봉 영화 '스펜서'

영화 '스펜서' 속 다이애나 왕세자빈은 영국 왕실이라는 껍질을 깨고 나가기 위해 고심하다 결단한다.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영화 '스펜서' 속 다이애나 왕세자빈은 영국 왕실이라는 껍질을 깨고 나가기 위해 고심하다 결단한다.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카메라가 고급스포츠카 한 대를 내려다본다. 차는 한적한 교외 길을 달리는 중이다. 운전자는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빈(크리스틴 스튜어트)이다. 그는 어느 작은 휴게소에 차를 멈춘다. 사람들 시선에는 아랑곳 않고 식당 주인에게 묻는다. “길을 잃었어요. 제가 어디에 있는 건가요?” 영화 ‘스펜서’의 도입부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영화는 1991년 크리스마스 전후 3일 동안 벌어진 이야기를 그린다. 영국 왕실의 샌드링엄 별장이 공간 배경이다. 다이애나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스텔라 고넷) 등 왕실 구성원들과 관계가 불편하다. 찰스 왕세자(잭 파딩)와 카밀라 파커 볼스의 부적절한 관계가 원인 중 하나다. 다이애나는 두 아들 윌리엄과 해리를 제외하고는 왕실 구성원과 크리스마스 연휴를 함께 보낼 마음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도착한 별장은 다이애나의 예상대로다. 왕실은 전통을 내세워 마음과 몸을 옥죈다. 다이애나는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몸무게를 잰다. 크리스마스 이브 별장에 들어온 후 크리스마스를 보낸 뒤 떠날 때까지 음식을 마음껏 즐겼는지 알기 위한 방편이다. 19세기 시작돼 100년 넘게 이어진 전통이다. 다이애나는 “영어 시제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있는데 왕실에는 미래가 없다”고 두 아들에게 말한다.

찰스 왕세자는 다이애나 왕세자빈에게 왕실의 규범과 전통을 강요하나 다이애나는 자신을 희생할 생각이 없다.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찰스 왕세자는 다이애나 왕세자빈에게 왕실의 규범과 전통을 강요하나 다이애나는 자신을 희생할 생각이 없다.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다이애나를 숨 막히게 하는 일이 연잇는다. 끼니 때마다 입어야 할 옷이 정해져 있고, 일정은 빈틈 없이 이어진다. 방에는 누군가 앤 불린(1507~1536)의 삶을 돌아본 책을 놓아두었다. 불린은 영국 국왕 헨리 8세(1491~1547)의 두 번째 아내였으나 왕의 미움을 사 처형됐다. 책은 다이애나를 향한 경고장 같다. 다이애나는 오로지 왕실 구성원의 재미를 위해 키워지는 사냥용 꿩과 같은 신세다.

‘스펜서’는 다이애나의 잘 알려진 삶을 스크린 위에 반복 재현하기보다 그의 삶의 결정적 한때였을 순간을 클로즈업한다. 성난 파도처럼 진퇴를 거듭하는 다이애나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다이애나가 왕세자빈이라는 허울을 벗고 왕실을 뛰쳐나가기로 결심하게 된 과정을 섬세한 묘사로 포착한다.

다이애나의 심리 변화를 전하는 상징이 여럿 있다. 다이애나가 별장 인근 밭에서 발견하는 아버지의 낡은 코트, 다이애나가 어린 시절을 보낸 폐가, 크리스마스 다음 날 벌어진 왕실 사냥 등이다. 다이애나는 폐가를 찾아 어린 시절을 돌아보고 자신의 현재를 진단한다. 그는 폐가를 다녀온 후 왕실의 전통과 규범에 복종하길 거부한다. 그는 아버지의 코트를 입고선 꿩 사냥 저지에 나선다. 두 아들과 함께 런던으로 돌아가 남은 크리스마스 연휴를 보내겠다고 선언한다. ‘윈저’(왕실 성)가 아닌 ‘스펜서’(결혼 전 성)로 살기로 결심한다. 소설 ‘인형의 집’의 노라가 자아를 찾아 가부장제적 집안을 뛰쳐나가는 대목을 닮았다. 다이애나가 별장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의지하는 왕실 직원 매기(샐리 호킨스)는 다이애나에게 조언한다. “다이애나, 당신의 무기는 당신 자신이에요.” 영화의 메시지가 함축된 말이다.

다이애나 왕세자빈이 크리스마스 연휴를 함께 하고픈 왕실 구성원은 두 아들 윌리엄과 해리뿐이다.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다이애나 왕세자빈이 크리스마스 연휴를 함께 하고픈 왕실 구성원은 두 아들 윌리엄과 해리뿐이다.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스튜어트의 연기가 여러 장인이 참여한 세공을 바탕으로 두드러진다. 그가 지난달 열린 미국배우조합상(SAG) 후보에 오르지 못한 걸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스튜어트는 27일 열릴 제94회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 여우주연상 후보 명단에는 포함됐다.

칠레 감독 파블로 라라인이 연출했다. 재클린 케네디와 파블로 네루다의 삶을 각각 그린 ‘재키’와 ‘네루다’(2016)로 국내 영화 팬들에게 알려진 이다. 라라인 감독은 전기 등 역사를 담아낸 영화에서 실력 발휘를 해왔다. 국내 개봉하지 않은 ‘토니 마네로’(2008), ‘노’(2012) 등 칠레 현대사를 묘사한 영화들 역시 그의 대표작이다. ‘스펜서’는 라라인 감독의 전작 ‘에마’(2019)의 연장선상에 있다. ‘에마’는 이기적인 전 남편에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복수하는 한 여인의 자아 찾기를 담았다. ‘스펜서’ 개봉은 16일. 12세 이상 관람가.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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