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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이 새로 쓴 전염병 소설… 오르한 파묵 ‘페스트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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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이 새로 쓴 전염병 소설… 오르한 파묵 ‘페스트의 밤’

입력
2022.03.11 04:30
수정
2022.03.11 09:28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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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 민음사 제공

오르한 파묵. 민음사 제공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미증유의 공포가 닥쳤을 때 사람들은 문학으로부터 나아갈 길을 구하고자 했다. 전 세계에 전염병 공포가 확산되면서 앞선 시대 전염병을 다룬 소설들이 잇따라 주목받았다. 75년 전 출간된 알베르 카뮈의 고전 ‘페스트’(1947)는 첫 코로나19 환자 발생 이후 1년 동안 20만 부가 넘게 팔렸다.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서 만들어진 신종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퍼진다는 내용을 담은 딘 쿤츠의 ‘어둠의 눈’(1981) 역시 코로나19를 예견한 소설로 전 세계의 관심을 끌면서 출간 40년 만에 국내 번역이 이뤄졌다.

그리고 코로나19 발생 3년을 넘긴 지금, 동시대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이 쓴 전염병 소설이 출간됐다. 200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의 신작 장편소설 ‘페스트의 밤’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페스트가 창궐한 세계를 그린다. 코로나19 이후 출간된 최초의 전염병 소설이자 파묵이 5년간 매진해 써낸 신작이다. 앞서 ‘고요한 집’(1983)과 ‘하얀 성’(1985) 등의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던 작가의 전염병에 대한 관심이 이번 소설에서는 아예 주요 소재가 됐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출간되긴 했지만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오히려 100년 전 과거로 돌아갔다. 오스만제국 몰락기인 1901년 동지중해에 위치한 가상의 섬 민게르에 3차 페스트가 발생한 6개월간의 시간을 그린다. 오스만제국하에 있는 민게르섬은 천연으로 분홍색을 띠는 하얀 돌로 인해 멀리서도 오렌지빛으로 빛나는 섬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작고 평화로운 섬에 페스트가 퍼지고 섬은 혼란에 휩싸인다.

페스트의 밤.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민음사 발행. 780쪽. 1만9,000원

페스트의 밤.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민음사 발행. 780쪽. 1만9,000원


페스트 자체는 단순하게 방역하고 치료하면 되는 것이었지만, 문제는 민게르섬의 8만 인구가 이슬람교와 그리스정교회가 정확히 반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이다. 오스만 황실 화학자이자 방역 전문가인 본코프스키 파샤가 섬에 파견되지만, 정통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방역을 제대로 시행해보기도 전에 거리에서 피투성이로 발견된다. 본코프스키 파샤의 죽음 이후 의사인 누리가 아내이자 무라트5세의 딸인 파키제 술탄과 함께 새로운 방역 전문가로 섬에 파견된다.

그러나 방역 조치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과 행정부의 무능으로 인해 방역은 실패로 돌아가고, 심지어 술탄은 서구 열강의 압력에 못 이겨 민게르섬을 봉쇄하기에 이른다. 이 모든 과정은 필연적으로 민게르섬에 독립을 불러온다. 섬의 엄격한 격리조치에 반발한 사람들은 혁명을 일으키고, 열강의 전함에 둘러싸여 있던 민게르섬은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파키제 술탄이 독립한 민게르섬의 여왕으로 선출된다. 소설은 훗날 파키제 술탄의 증손녀가 그녀의 서신을 바탕으로 이 모든 일을 재구성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35년 전 이 소설을 구상했던 파묵은 원고가 완성돼 갈 무렵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창궐을 겪게 된다. 파묵은 "처음 코로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마치 내 소설 속 이야기 같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민음사 제공

35년 전 이 소설을 구상했던 파묵은 원고가 완성돼 갈 무렵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창궐을 겪게 된다. 파묵은 "처음 코로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마치 내 소설 속 이야기 같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민음사 제공


‘페스트의 밤’은 전염병이 창궐한 세계를 그린 재난 소설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혁명과 독립, 국가의 탄생을 그리는 정치 사회 소설에 가깝다. 더불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오스만제국 몰락기를 짐작해보게 만드는 역사 소설이자 미스터리한 죽음을 파헤쳐 가는 추리 소설이기도 하다.

35년 전 이 소설을 구상했던 파묵은 원고가 완성돼 갈 무렵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창궐을 겪게 된다. 파묵은 “처음 코로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마치 내 소설 속 이야기 같다고 생각했다”고 밝힌다. 결과적으로, 코로나19를 예감조차 하지 못했을 때 구상된 이 소설은 풍부한 정치 사회적 맥락과 파묵의 엄격한 문학적 미학이 더해진 780페이지의 대작으로 완성됐다.

소설은 전염병 자체의 두려움을 묘사하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전염병을 맞닥뜨린 인류의 혼란과 대응에 주목한다. 이를 통해 전염병은 바이러스와 인류의 대결이라기보다는 인류 자신의 시험대라는 자명한 진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이 진리는 전염병의 종류가 무엇이든 그 위력이 작든 크든 상관없이 동일할 것이기에, ‘페스트의 밤’은 훗날 코로나19 이후 또다시 비슷한 전염병이 닥쳐올 때마다 두고두고 읽히게 될 것이다. 불행히도 기후위기와 환경파괴로 인한 전염병 가능성은 언제고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으니.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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