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가운데는 일본 제국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했다는 소식에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감을 느꼈던 부류도 있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1945년 8월 15일을 맞았던 최영우가 그랬다. 그는 1923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친 직후, 일본군의 징병을 피하려고 일본군 포로감시원(군속)으로 자원한 몸이었다. 1942년 8월 19일 부산항을 떠나온 후로 지난 3년간 인도네시아 곳곳의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서양인 포로들을 관리했다. 그의 외손자인 최양현 작가가 외할아버지가 남긴 기록을 정리하고 보충해 내놓은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에는 연합국의 대일처리방침(포츠담선언)을 접한 최영우의 고뇌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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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무렵의 최영우. 효형출판 제공
“일본의 영토가 본토로 한정되니 그것은 조선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동안 일본인에 의해서 얼마나 많은 압박과 강요를 당했던가. 어서 빨리 조국에 가고 싶다. (중략) 그러나 그 다음 조항이 꺼림칙하다. 우리가 관리한 포로들은 오랜 시간 고생을 했다. 억류자 수용소에서는 매일같이 노인과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죽어 나갔다. 이제 처지가 바뀌었으니 그들은 우리를 어떻게 취급할까? 이제 와서 변명할 생각도 없고, 오직 관대한 처분을 바랄 뿐이다.”
저자는 외할아버지가 일본군 아래서 일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최영우는 ‘장남은 할 일이 많으니 차남인 네가 형제들을 대신해 전쟁터에 다녀오라’는 집안 어른의 권고를 받아들여서 일본군을 따라서 동남아시아로 떠났고 포로수용소에서 일했다. 거기에는 ‘강제로 끌려갈 것이라면 전투에 나서는 군인보다는 공무원이 낫겠다’는 고려가 있었다. ‘드넓은 세상을 직접 경험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도 없지 않았다. 최영우는 창씨개명에 반발해 태극기를 그렸지만 그것을 ‘차마 드러내지 못하고 함 안 깊숙이 넣어둔’ 조선인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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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우가 일했던 여러 수용소 가운데 하나인 자카르타 주변 글로독 수용소 내부. 글로독 수용소는 과거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 범죄자나 독립운동가를 투옥했던 장소로 유명하다. 효형출판 제공
최영우의 기록은 초반에는 여행기처럼도 보인다. 동서양이 뒤섞인 식민지 풍광을 소개하기도 한다. 일본군을 화란(네덜란드)을 물리친 해방자로 인식하고 환대했던 자바섬 주민들의 모습도 나타난다. 그러나 밝았던 분위기는 전황이 일본에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점점 어두워진다. 자신이 탑승한 수송선이 공격을 받고 침몰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한다. 보급이 줄면서 민간인 수용자들 가운데 사망자가 속출하는 대목에서 최영우는 그들의 미래에 “우리처럼 패잔 민족의 서러움이 뼈에 사무칠 것이다”라고 자조한다. 포로가 “당신 코리아 사람이지?”라고 물어오자 “아니다. 나는 일본인이다, 일본인”이라고 답변하고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전쟁이 끝나고 네덜란드군에 체포된 최영우는 포로 및 전쟁범죄자 용의자 신분으로 싱가포르 창이 전범 수용소에 수용된다. 그가 기록한 조선인 수용자 규모는 600~700명 남짓이다. 자카르타 인근 치피낭 형무소에 수감된다. 사형까지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처분을 기다리며 최영우는 “우리가 포로들을 감시했을 때 약간의 친절과 연민을 보였더라면, 저들도 우리에게 두 배의 호의와 동정으로 갚으련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과오를 인정한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는 1947년 3월 석방 통보를 받고 그해 9월 고향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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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 최양현 최영우 지음ㆍ효형출판 발행ㆍ228쪽ㆍ1만4,000원
인간이 자신의 행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길은 없다. 그러나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것도 부당한 일이다. 저자는 그의 외할아버지를 비롯해 ‘일본의 침략전쟁에 동원된 모든 젊은이들이 비극의 희생자’였다면서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한다. 나아가 일본군은 조선인 군속에게 포로를 인도적으로 대우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고 전쟁이란 상황은 당대의 젊은이들에게 ‘승리를 위해서는 상대방의 인권과 존엄을 짓밟아도 된다고 가르쳤다’고 비판하면서 이렇게 강조한다. “나의 외할아버지 역시 이 서글픈 비극의 역사에 강제로 내던져진 젊은이들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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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우가 생전에 작성한 포로감시원 생활 기록의 일부. 효형출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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