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통사고로 인한 뇌손상으로 15년간 식물인간 상태였던 35세 남성이 2017년 의식 회복 가능성을 보였다. 눈 앞 사물 움직임에 눈동자가 따라갔고, 의료진의 말을 알아듣고 머리 방향을 돌렸다. 갑자기 다가오는 물체에 눈을 크게 떠 '놀라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프랑스 국립인지과학연구소에서 3개월 동안 환자 쇄골 밑에 이식한 '전자약'을 활용해 환자의 미주신경을 자극한 결과다. '12개월 이상 지속된 의식장애는 돌이킬 수 없다'는 통념을 깬 순간이었다.
화학이나 생물제제가 아닌 전기신호로 병을 치료하는 '전자약(electroceuticals)' 시장이 빠르게 커지고 있다. 기존 치료제에 비해 부작용 가능성이 낮은 데다, 코로나19 이후 필요성이 급증한 비대면 진료가 가능하다는 장점 때문이다. 대상 질환은 우울증·치매부터 암, 당뇨병, 안구건조증까지 다양하다. 특히 다국적 제약사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전통 치료제와 달리 전자약에서는 정보통신기술(ICT)과 바이오 기술을 앞세운 국내 스타트업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병원만하던 기계가 손바닥 속으로...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전자약 시장
8일 의학계에 따르면 전기 자극을 이용한 치료라는 측면에서 전자약의 역사는 길다. 기원은 정신의학에서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전기경련요법(ETC)으로, 1938년에 시작됐다. 1990년대에는 파킨슨 환자 뇌에 칩을 심어 전기신호를 주는 기술, 2000년대에는 자기장 등으로 뇌 특정 부위를 활성화하는 기술도 나왔다. 그러나 모두 외과적 수술이나 정교한 조작이 필요해 '약'보다는 '시술'이나 '수술'에 가까웠다.
병원을 가득 채우던 거대한 기기가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전자약이 된 것은 ICT와 바이오 기술 발달 덕분이다. 약한 전류로 정확히 원하는 부위를 자극할 수 있게 됐고, 형태도 머리에 쓰는 헬멧이나 머리띠부터 알약 크기 기기, 손목시계까지 다양해졌다. 비용도 저렴해졌다. 의료진의 비대면·실시간 모니터링과 피드백도 가능하다. 환자가 집에서 혼자 약을 챙겨먹듯 편하게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2018년 세계경제포럼(WEF)에서는 '10대 미래유망기술' 중 하나로 전자약을 꼽았다. 평균 15년 이상의 개발 기간과 3조 원 이상의 비용이 드는 전통 치료제와 달리 개발 기간 3~5년, 비용 100억~300억 원 수준인 전자약 시장이 단기간에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이라 내다본 것이다. 업계에서는 전자약 시장이 연평균 7.67% 성장해 2027년 45조2,000억 원 규모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식약처 문턱 넘어 FDA까지 노리는 한국 스타트업
국내 전자약 시장은 스타트업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다. 지난해엔 국내 최초로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를 받은 전자약도 나왔다. 와이브레인이 개발한 재택용 우울증 전자약이다. 임상시험까지 거쳐 허가를 받은 우울증 전자약은 세계 최초다. 김성진 와이브레인 이사는 "의료진의 실시간 맞춤 관리가 가능하기 때문에 환자들의 약물 오남용 위험을 원천 차단할 수 있다"며 "임신부나 청소년, 항우울제 부작용 환자 등 전통 치료제를 사용하기 어려웠던 환자들에게도 효과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와이브레인은 올해 안에 치매 전자약 임상시험을 마치고 식약처 허가를 신청할 예정이다.
뉴아인에서는 현재 안구건조증이나 녹내장, 편두통 등에 대한 전자약을 개발 중이다. 전기 자극으로 각막 신경이나 시신경이 재생되는 효과를 확인했다는 게 업체의 설명이다. 김평규 뉴아인 이사는 "기존 약을 먹으면 화학물질이 혈관을 타고 온몸을 돌면서 원치 않는 부작용이 발생할 위험이 높지만 전자약은 정확히 치료가 필요한 특정 장기나 신경만 자극해 부작용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지난달 용홍택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제1차관은 공개적으로 전자약 업체를 방문해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정부는 올해 전자약 기술개발 사업 지원 예산으로 전년 대비 24억 원 늘어난 52억 원을 책정했다.
예상치 못한 오류 가능성 여전..."가격 낮추고 안정성 높여야"
다만 전자약이 아직 사람들에게 친숙하지 않은 기술인 만큼 예상치 못한 오류나 부작용 가능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미국에서 뇌전증 환자 치료에 활용됐던 리바노바의 전자약은 의도치 않은 초기화, 소프트웨어 표시 오류 등의 이유로 네 차례나 리콜 조치가 취해졌다. 사망 사례는 없었으나 기기를 이식한 환자가 재수술이 필요한 경우가 생기기도 했다.
DB금융투자는 2020년 발간한 보고서에서 "전자약이 기존 의약품보다 우월하지 못하다면 보수적인 의료 시장에서 자연도태될 가능성이 높다"며 "가격을 낮추고 안정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기술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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