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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그라드, 키이우 그리고 서울

입력
2022.03.08 04:30
수정
2022.03.08 04:36
26면
0 0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월 27일(현지시간)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봉쇄 해제 78주년'을 맞아 당시 희생자들이 묻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피스카료프스코예 기념 묘지를 찾아 헌화하고 있다. 나치 독일은 2차 세계대전 당시 900여 일간 소련 레닌그라드를 포위 공격했고 10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월 27일(현지시간)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봉쇄 해제 78주년'을 맞아 당시 희생자들이 묻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피스카료프스코예 기념 묘지를 찾아 헌화하고 있다. 나치 독일은 2차 세계대전 당시 900여 일간 소련 레닌그라드를 포위 공격했고 10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연합뉴스

국가 간 무력충돌이 없었던 때가 한시라도 있었던가 싶지만, 2022년에 전면전이 발발할 줄이야. 그것도 유럽에서, 강대국이 약소국을 상대로 한 침략전쟁을 벌일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 압도적 군사력을 지닌 러시아는 개전 즉시 승전할 수 있을 거라 자신한 듯하다. 세계 주요 언론들도 러시아군이 이틀이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점령할 수 있을 거란 전망을 일찌감치 쏟아냈다.

하지만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의용군을 꾸리며 항전 의지를 다졌던 우크라이나 국민은 그 모든 전망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키이우 시민들은 화염병으로라도 조국을 지키겠다며 돌진해 오는 러시아 탱크와 장갑차에 맞서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는 신나치주의 국가이고 러시아군은 평화유지군이라고 침략을 정당화하지만 “우크라이나에 나치는 없다”며 사실상 집총을 거부하는 러시아 군인도 속출하고 있다.

러시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방전’으로 큰 희생을 치른 역사가 있다. 나치 독일은 1941년 6월 소련에 대한 전면전을 감행하면서 러시아의 정치∙경제∙문화 중심지이던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무차별 포격을 가했다. 소련은 포위망을 뚫어내지 못했지만, 결사 항전에 나선 시민들은 아사자가 속출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3년 가까이 버틴 끝에 전쟁에서 승리했다. 350만 명이던 레닌그라드 인구는 종전 직후 75만 명에 불과했다. 푸틴 대통령이 히틀러식 ‘기습 작전’(블리츠크리그)으로 우크라이나를 굴복시킬 수 있다고 오판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국제정치 전문가들은 6∙25전쟁이 동서 냉전시대의 서막이었다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지구촌은 새로운 냉전의 블랙홀로 급속히 빨려 들어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스트롱맨’들이 국제정치 전면에 포진한 이후 꾸준히 제기됐던 우려가 현실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소련 붕괴는 20세기 최대 비극”이라며 옛 소련 당시 영토 회복을 공언하고 있고, 유례없는 ‘중국굴기’를 내세우며 3연임에 성공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통일을 명분으로 대만을 무력 점령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 지도 오래다.

신냉전시대, 우리는 한반도에 닥쳐올 운명을 맞이할 준비가 돼 있는가. 북한은 대선을 앞두고 연이어 중거리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를 하며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핵실험이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라는 고강도 도발에 나선다면 한반도 정세는 한순간에 격랑에 휘말리게 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 대한 대비도 시급하다. 중국은 지난 2년간 대만 해협에서 군사 활동 빈도를 높이고 있고, 미국은 대만 방어를 위한 동맹국 협조를 기대하고 있다. 북핵 문제를 머리에 이고 있는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북한에 대한 영향력이 절대적인 중국을 자극하지 않아야 한다는 당위론이 얼마나 설득력을 유지할지 의문이다.

신냉전시대가 열리는 시점에 치러지는 이번 대선의 무게는 그래서 더 무겁지만, 안타깝게도 대장동 개발∙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공방만 난무하는 통에 국민들은 후보들의 자질은 검증할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했다. ‘역대급 비호감’ 대선인 탓이라고 넘기기엔 그 대가가 너무 커 보인다.

이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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