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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여자로 만드는 병’에 걸렸다… 그녀는 인생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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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여자로 만드는 병’에 걸렸다… 그녀는 인생을 택했다

입력
2022.03.09 04:3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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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개봉 프랑스 영화 '레벤느망'

영화 '레벤느망'의 안은 자유분방하게 살고 싶으나 현실은 쉽지 않다. 욕망은 인생의 발목을 잡으나 안은 이에 순순히 굴복하려 하지 않는다. 왓챠 제공

영화 '레벤느망'의 안은 자유분방하게 살고 싶으나 현실은 쉽지 않다. 욕망은 인생의 발목을 잡으나 안은 이에 순순히 굴복하려 하지 않는다. 왓챠 제공

안(아나마리아 바르톨로메이)은 우등생이다. 교수가 교수 재목으로 인정할 정도로 특출하다. 될성부른 인재인 안은 꿈이 남다르다. 동급생들과 달리 교사가 목표는 아니다. 작가가 되고 싶다. 전공인 문학에 대한 애정이 깊기도 하다. 하지만 갑작스런 일이 생긴다. 임신을 하며 발목을 잡힌다.

안은 아기를 원치 않는다. 졸업이 우선이고, 작가가 빨리 되고 싶다. 미혼모로선 불가능할 일이다.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 물심으로 후원하는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릴 수도 없다. 일이 간단치는 않다. 임신중절은 불법이다. 친절하던 의사조차 낙태를 언급하자 냉랭해진다. 친구들에게 고민을 털어놓기 쉽지도 않다. “몸을 함부로 굴려 벌어진 일”이라는 비난이 두렵다. 공부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눈앞에 둔 졸업 자격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은커녕 실격할 가능성이 커진다. 안은 자신의 몸이 만들어낸 인생의 난관을 어떻게 해쳐나갈 것인가. 프랑스 영화 ‘레벤느망’은 안의 고독하고도 처절한 싸움을 들여다본다.

안은 아기의 아빠가 될 남자를 찾아가나 그는 책임지기보다 상황을 모면할 생각만 한다. 왓챠 제공

안은 아기의 아빠가 될 남자를 찾아가나 그는 책임지기보다 상황을 모면할 생각만 한다. 왓챠 제공

1963년 프랑스를 배경으로 했다. 약 60년 전 벌어진 일이라고 하나 수백 년 전 있었던 사연 같다. 안을 둘러싼 사회환경은 중세시절을 연상케 한다. 안의 친구들은 겉으로는 순결을 내세운다. 성관계를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어서다. 친구를 보호한다며 서로 이성관계를 감시하기도 한다. 남자들의 태도 역시 봉건적 사회분위기를 반영한다. 안이 남자 동급생에게 낙태를 위해 도움을 요청하자 그는 “그 친구랑 할 때 좋았어?”라며 기괴한 호기심을 드러낸다. 기습 키스를 시도하며 성관계를 요구하기도 한다. “임신했다며? 안전하잖아.” 어느 의사는 유산 예방 약물 처방을 해주면서 “생리가 돌아올 것”이라고 안을 기만하기도 한다. 아기의 아빠가 될 남자는 자기체면 찾기에만 급급하다.

안은 자기 인생의 주체가 되고 싶다. “언젠가 아이를 갖고 싶어”하면서도 “다만 인생과 바꾸고 싶지 않아”한다. 결국 자신의 목숨과 맞바꿀 수 있는 선택을 한다. 카메라는 안의 선택을 차분하게 바라본다. 안은 임신을 마냥 부정적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임신한 여자를 향한 시선과, 미혼모에게 가해지는 부조리한 처분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뿐이다. 영화 결말부 안은 학업이 부진했던 이유를 교수가 묻자 이렇게 답한다. “집에 있는 여자로 만드는 병에 걸렸어요.” 안은 남성과 달리 임신을 하면 삶의 모든 계획들을 포기해야 하는 여성이 되길 거부했던 거다. 영화는 낙태라는 민감한 주제 위에 노동자 계급 출신 안이 중산층 급우들 사이에서 겪게 되는 방황과 성장기, 육체적 욕망을 포갠다.

안은 인생이라는 험난한 파도 속에서 유영하듯 자기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왓챠 제공

안은 인생이라는 험난한 파도 속에서 유영하듯 자기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왓챠 제공

화면에서 안의 모습은 종종 프레임 안에 꽉 차 있다. 쉬 바뀌지 않는 사회 속에서 안이 처한 불우를 표현하기 위해서다. 영화는 안이 임신중절을 위해 행하는 여러 일들을 가감 없이 보여주려 한다. 안의 고뇌와 고통을 왜곡하지 않고 전하기 위해서다.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82)의 자전적인 소설 ‘사건’(2000)을 밑그림 삼았다. 프랑스에서는 1975년 낙태를 처벌하지 않는 법이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프랑스의 신예 오드리 디완 감독은 “우리가 거의 다루지 않았던 역사의 한 시대를 상세히 보여준다”고 말했는데, 안과 같은 상황에 처한 여성들은 세계 곳곳에 아직 많다.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10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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