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당 안 되는 약값...질환 진단 잘 하는 의사만으론 역부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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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 안 되는 약값...질환 진단 잘 하는 의사만으론 역부족입니다

입력
2022.03.15 12:00
수정
2022.03.15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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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이지훈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편집자주

의료계 종사자라면 평생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 하나쯤은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명을 구한 환자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에게 각별한 의미를 일깨워준 환자일 수도 있다. 아픈 사람, 아픈 사연과 매일 마주하는 의료종사자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어느 11월의 늦은 오후.

진료실에 걱정스러운 표정의 한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들어왔습니다. 진료실 침대에 아기를 내려놓으면서 어머니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습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아이는 두려운 듯 경계하는 표정이었고, 곧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의 표정과 아이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저도 마음이 복잡해졌습니다. 이제 생후 10개월이 된 아이는 목을 가누지 못하고, 혼자 앉지도 못하고, 누워만 있었습니다. 아이는 얼른 제게서 도망쳐 어머니에게 안기고 싶어하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실상은 누워 있기만 하고 팔다리를 힘차게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진찰을 하면서 짐작이 가는 질환이 있었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일단 검사부터 하기로 했습니다.

2주쯤 지나 부모와 아이가 결과를 들으러 왔습니다. 저에겐 너무나도 어려운 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아무리 의사라지만 "아이가 걷지 못할 거예요. 호흡이 나빠서 인공호흡기에 의지해서 지내게 될 겁니다"라고 말하는 건 너무 어렵습니다.

척수성 근위축증. 저는 부모에게 이 질환이 무엇이고, 앞으로 경과가 어떨지 설명했습니다. 새로운 치료법들에 대한 임상시험이 진행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보자고 위로도 했습니다. 그 가족이 진료실을 나간 뒤, 그 시간 이후에는 무엇을 했는지도 모르게 하루가 지나갔습니다.

또 다른 아이가 있습니다. 세상에 나온 지 한 달도 안 된 신생아였습니다. 첫 아이를 막 품에 안은 앳된 부모가 걱정 반 두려움 반의 얼굴로 진료실을 찾아왔습니다. 같은 질환이 의심이 되어 유전자 검사를 하고 돌아간 지 며칠이 되지 않아, 아이가 열이 나서 힘들어 한다고 응급실에 왔습니다.

척수성 근위축증은 호흡근육을 비롯해 우리 몸의 모든 근육을 움직이는 신호가 나오는 척수의 운동신경원이 점점 파괴되는 질환입니다. 일반인과 달리 약한 폐렴에만 걸려도 호흡이 매우 곤란한 상황이 됩니다. 아이는 흔한 호흡기 바이러스에 걸린 것으로 진단되었는데 이내 폐렴이 되어 소아중환자실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환자는 아이가 아니라 갓 스물이 넘은 어른입니다. 어려서부터 발달이 느려 진작에 척수성 근위축증 진단을 받았으며, 병이 더 진행해 이제는 휠체어에 의지하여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세 환자에서 공통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저를 간절히 바라보는 부모들의 눈빛입니다. 질환을 잘 진단하는 의사 말고, 우리 아이를 잘 치료하는 의사가 되어달라는 무언의 외침을 듣게 됩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새로운 약제를 우리나라에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드문 유전질환을 치료하는 약제를 사용한 지 이제 거의 3년이 되었습니다.

첫 아이는 이제 네 돌이 되어가는데 혼자 앉아 잘 놀고, 잡고 일어서서 옆으로 걸을 수 있습니다. 말을 너무 잘하고 노래도 잘한다고 하는데, 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아주 새침데기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회진을 가면 아주 새침한 표정을 짓는데 너무 예쁩니다. 늦가을 오후 진료실에서 큰 걱정을 하던 어머니의 얼굴에 생긴 미소가 너무 반갑기도 합니다.

두 번째 아이는 제법 개구쟁이가 되어 여러 가지 재주를 보여줍니다. 회진을 가서 만나면 몇 달 만이지만 무척이나 반가워 하고 새로운 장난감을 보여주기도 하면서 자랑을 합니다. 처음 진단을 받고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지내던 힘든 시간에도 호흡이 편해지면 보였던 장난스러운 눈빛이 이제 이해가 갑니다. ‘아하, 참 활발하고 장난기가 많은 아이구나’ 하고요.

세 번째 어른 환자는(소아청소년과에서는 '어르신'이라고 애칭합니다) 여전히 걷지를 못합니다. 아니, 이제 겨우 목을 조금 가눌 수 있습니다. 그래도 치료제를 사용하면서 얻게 된 큰 변화는 무엇인가를 쥘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손가락을 까딱하는 정도의 움직임이었는데, 지금은 물건을 쥘 수 있을 정도가 되면서 마우스 클릭도 하고 손가락을 써야만 하는 많은 일을 합니다. 목에 힘을 주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릴 수도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큰 변화는 아니지만 가족들이나 가까운 사람이 보기에는 큰 변화입니다. 참고로 이 환자는 전동휠체어 운전을 아주 잘합니다. 좁은 진료실을 후진으로 나가서 좌회전을 하여 복잡한 복도를 빠져나가는 묘기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정말 베스트 드라이버입니다.

소아청소년의 희소유전질환의 경우, 진단은 하지만 치료제가 없는 경우가 아직도 대부분입니다. 드물지만 최근 세상에 나온 치료제들은 가히 상상할 수 없는 만큼 가격이 비싸서 사용하는 것이 너무 제한적입니다.

환자를 치료하다 이런 한계로 답답함을 느낄 때면,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 어려운 질환치료를 위해 특별법을 만들어 줄 수는 없을까. 어느 고마운 분들이 이 환자들을 위해 큰 기부금을 내어주면 어떨까. 누군가 싼 값에 약을 만들면 얼마나 좋을까...그리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병이 진행한 뒤에는 이 비싼 치료제를 써도 그만한 효용을 얻지 못하니 증상이 생기기 전에 진단을 할 수 있도록, 신생아 선별검사에 치료제가 있는 유전질환이 포함되기를 제안합니다.

'우리 아이들의 작은 미소가 우리 모두를 힘나게 합니다.'

삼성서울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및 유전자치료센터장

※잊지 못할 환자에 대한 기억을 갖고 계신 의료계 종사자분들의 원고를 기다립니다. 문의와 접수는 opinionhk@hankookilbo.com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선정된 원고에는 소정의 고료가 지급되며 한국일보 지면과 온라인페이지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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