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남부 말라카의 상업지구에는 동서양의 고전적 건축양식이 뒤섞인 독특한 풍경이 펼쳐져 있다. 도로를 중심으로 양쪽에 나지막한 2층짜리 건물들이 들어섰다. 1층은 상점, 2층은 주거공간으로 쓰인다. 진흙 벽돌로 쌓아올린 벽의 한가운데는 외부의 공기와 빛을 끌어들이는 중정을 두기도 한다. 말라카에는 이러한 형태의 건물만 600여 개가 존재한다. 1641년부터 200여 년간 말라카를 지배하며 동남아시아의 해상교역을 장악했던 네덜란드의 필지 개발방식에 중국의 건축양식, 말레이의 토착 건축양식이 뒤섞여 나타난 건축물로 이를 ‘숍하우스’라고 부른다. 동남아시아 도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건축양식이다.
동남아시아의 문화적 다양성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한광야 동국대 건축공학부 교수는 이달 출간한 ‘동남아시아 도시들의 진화’에서 답을 제시한다. 동남아시아의 도시들이 동서양의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을 연결하는 해상교역로에서 중요한 고리였다는 사실을 도시설계 전문가의 시각으로 분석한다. 토착민과 이주민, 식민지 지배 세력, 외국자본이 뒤섞이면서 이들의 문화가 어떻게 도시를 형성해왔는지 풀어낸다. 동남아시아를 대표하는 대도시로 성장한 하노이·쿠알라룸푸르·자카르타·마닐라·방콕·말라카·호찌민·싱가포르와 함께 해상교역로를 구성했던 홍콩·나가사키·광저우·타이베이까지 열두 도시의 성장사를 재정의한다.
이에 따르면 동남아시아는 기원전 1500년 무렵부터 다양한 문화들이 오가는 통로로 활용됐다. 인도 동부와 중국 남부를 연결하는 말라카해협과 남중국해를 통해서 실크와 향신료, 도자기와 차가 양쪽을 오갔다. 힌두교와 대승불교, 이슬람교, 기독교도 바닷길을 따라서 동양으로 전래됐다. 15세기에는 이슬람 상인들을 비롯해 명나라의 지원을 받은 토착세력이 해상교역로의 패권을 장악했고 16세기 이후로는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스페인, 미국 등이 경쟁에 뛰어들었다. 특히 유럽 국가들이 이 지역에 철도를 비롯해 학교와 병원, 은행, 상업지구, 주거지구 등의 사회기반시설을 건설하면서 동남아시아 도시에서 동서양의 문화가 뒤섞여 나타났다.
동남아시아 도시의 문화적 다양성은 토착세력과 식민지 지배세력뿐만 아니라 상인부터 이주민 노동자까지 해상교역에 뿌리를 둔 다양한 군상이 만들어낸 결과란 이야기다. 무엇보다 유럽 국가들이 추진한 항구 건설은 다양한 이주민을 도시로 끌어들였다. 기술자부터 노동자까지 다른 지역에서 온 이주민들은 건설사업이 종료된 후에 도시에 정착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냈다. 저자는 “대규모의 값싼 인력은 지역권을 넘어 대륙 간 이주를 통해 확보됐다”면서 그 이유를 “노동에 투입된 원주민이 필요 시 공동체를 조직해 지배 세력에 대항하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고안됐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방콕의 운하와 요새는 중국인 노동자들의 손으로 건설됐다. 태평천국운동과 아편전쟁을 피해서 방콕으로 이주한 중국인들은 건설사업이 끝난 후에는 시장과 회관, 사원, 학교를 짓고 중국인 공동체를 만들어냈다. 쿠알라룸푸르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 인도인 공동체가 자리 잡았다. 인도 남부 타밀나두인들은 1877년부터 쿠알라룸푸르 교외의 고무농장에서 일하다가 점차 철도산업으로 활동영역을 넓혔다. 옛 시청 청사에서도 인도-사라센 건축양식이 드러난다. 저자는 이러한 배경을 추적하면서 방콕·마닐라·하노이·사이공 등 동남아시아를 대표하는 도시들이 2,000만 명이 넘는 인구가 살아가는 광역도시권으로 성장했다고 강조한다. 한국에서 관광지로 널리 알려진 도시들을 새롭게 조명하는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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