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잭 더 리퍼’의 희생자들은 ‘죽어도 좋은 매춘부’가 아니었다
알림

‘잭 더 리퍼’의 희생자들은 ‘죽어도 좋은 매춘부’가 아니었다

입력
2022.03.04 04:30
15면
0 0

잭 더 리퍼에게 희생된 다섯 여자 이야기
핼리 루벤홀드 '더 파이브'

잭 더 리퍼 사건을 묘사한 당시 폴리스 뉴스의 삽화. 위피키디아

잭 더 리퍼 사건을 묘사한 당시 폴리스 뉴스의 삽화. 위피키디아

1888년 8월 31일 영국 이스트엔드 화이트채플 길거리에서 폴리 니컬스라는 여성의 시신이 발견된다. 이어 9월 8일에는 핸버리가의 어느 안뜰에서 애니 채프먼의 시신이 발견됐고, 9월 30일 이른 아침에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이드와 캐서린 에도스가 각각 버너가와 마이스터스퀘어에서 발견됐다. 11월 9일에는 메리 제인 켈리의 철저하게 훼손된 시신이 밀러스코프의 자택 침대에서 발견됐다. 다섯 피해자는 모두 목이 잘렸고 이 중 넷은 내장까지 훼손됐다. 이들은 훗날 이름 대신 이렇게 불리게 된다. 연쇄살인마 잭 더 리퍼에게 살해된 매춘부들.

잭 더 리퍼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범죄자다. 여전히 범인의 실체는커녕 이름마저 밝혀지지 않은 이 미제 사건은 130년에 걸쳐 여러 매체와 영화 드라마 게임 등을 통해 재구성됐고, 잭 더 리퍼는 실크해트와 망토 차림을 하고 피에 젖은 칼을 휘두르는 모습으로 아이콘화되었다.

역사 저술가이자 방송인인 핼리 루벤홀드는 그의 논픽션 ‘더 파이브’에서 살인마 잭 더 리퍼가 아닌 다섯 명의 피해자들을 중심으로 19세기 런던 화이트채플 살인 사건을 다시 쓴다. 잭 더 리퍼가 세계적인 스타 살인마가 되는 동안 자극적인 시신으로, 매춘부로만 이야기에 동원됐던 피해자 여성들에게 서사를 되찾아준다. 최선의 근거와 합리자인 추정에 기대 희생자들의 삶을 복원하는 과정을 통해 저자가 밝혀내고자 하는 것은 잭 더 리퍼의 ‘정체’가 아닌, 당시 빈민 여성의 처참한 삶과 가부장제의 사회구조, 그리고 130년 동안 유구하게 지속되어온 여성혐오 문화다.

1888년 11월 24일자 '페니 일러스트레이티드 페이퍼'에 실린 '타락한 여자' 메리 제인 켈리의 초상. 메리 제인 켈리는 다섯 피해자 중 가장 젊고 아름답고 눈에 띄게 성적인 인물이었기에 그의 삶이 가장 적극적으로 조사됐다. ⓒBridgeman Art Library. 북트리거 제공

1888년 11월 24일자 '페니 일러스트레이티드 페이퍼'에 실린 '타락한 여자' 메리 제인 켈리의 초상. 메리 제인 켈리는 다섯 피해자 중 가장 젊고 아름답고 눈에 띄게 성적인 인물이었기에 그의 삶이 가장 적극적으로 조사됐다. ⓒBridgeman Art Library. 북트리거 제공


폴리, 애니, 엘리자베스, 캐서린, 메리 제인. 책은 각각의 피해자들에게 저마다의 챕터를 내어주며 그들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뒤쫓는다. 부검 보고서와 증인들에 대한 사인 심문 내용, 언론 기사와 사회 연구자들의 저작을 샅샅이 뒤진 끝에 저자가 복원해낸 다섯 희생자들의 삶은 결코 단순히 ‘매춘부’로만 지칭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각 사인 심문 검시관의 결론에 따르면 폴리는 인쇄 기계공 윌리엄 니컬스의 아내, 애니는 마부 존 채프먼의 과부, 엘라자베스는 목수 존 토머스의 과부, 캐서린은 추정상 독신 여성이었다.

공개적으로 성매매에 종사했던 것은 메리 제인뿐이고 다섯 피해자 중 셋은 매춘부라고 할 만한 증거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매춘부로 범박하게 분류되었던 까닭은 이들이 모두 독신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폴리는 남편의 불륜으로 인해 반강제로 집을 등진 뒤 구빈원과 노숙을 전전했고 애니 역시 알코올중독에 발목이 잡혀 스스로 집을 떠났다. 엘리자베스와 케이트 역시 정식 결혼을 하지 않았다.

더 파이브. 핼리 루벤홀드 지음. 오윤성 옮김. 북트리거 발행. 468쪽. 1만8,500원

더 파이브. 핼리 루벤홀드 지음. 오윤성 옮김. 북트리거 발행. 468쪽. 1만8,500원


당시 아이를 낳아 길러야 할 여자가 독신으로 사는 것은 ‘이단 행위’로 여겨졌고 그런 여자들은 틀림없이 결함이 있거나, 실패자거나, 성적으로 부도덕할 것이라고 여겨졌다. 이들을 매춘부로 지칭하는 것은 이야기를 ‘성애화’시키기 수월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애니는 "가슴이 드러나는 웃옷을 입고 뺨을 붉게 화장한 채 가스등 아래에서 유혹적인 눈빛을 던지며 ‘길거리 호객’을 한 것으로” 그려지지만 이는 전부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고 피해자들이 ‘매춘부’가 아닌 ‘정숙한 여성’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 책의 목적은 아니다. 다만 이들이 가난한 알코올중독자고, 간통을 저질렀고, 밤늦게 밖을 돌아다녔고, 노숙을 했다는 정황으로 인해 매춘부로 분류됐으며, 이것이 이들을 ‘그렇게 끝나도 싼’ 인생으로 평가절하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엄마를 찾아 울던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사랑에 빠진 아가씨들이었다. 그들은 출산의 고통과 부모의 죽음을 겪었다. 그들은 웃으며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그들은 형제자매와 다투었다. 그들은 울었고 꿈꾸었고 상처받았고 작은 승리에 기뻐했다. 그들의 삶은 빅토리아 시대의 다른 수많은 여성과 비슷했지만, 죽음은 너무도 이례적이었다(…) 그들이 빼앗긴 것은 존엄성이었다.”

저자는 “잭 더 리퍼 사건의 핵심은 한 살인자의 지독하고 지속적인 여성혐오이며, ‘매춘부 연쇄살인마’에 대한 우리 문화의 집착은 바로 그 살인자의 여성혐오를 정상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일조할 뿐"이라고 말한다. 저자의 말처럼 "오직 이 사람들을 되살림으로써만 잭 더 리퍼와 그가 상징하는 것들을 침묵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한소범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