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번역서 '부동산, 설계된 절망'
"美 국가 공공 정책, 노골적으로 인종 차별 키워"
한국의 주거 지역 계층화와 닮은꼴
1947년 미국 뉴욕 맨해튼 외곽에 건설된 레빗타운(Levittown)은 한국의 아파트에 비견할 만한 미국의 전형적 교외 주택문화의 대명사다. 건설업자 윌리엄 레빗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주택 수요가 늘자 1만7,500가구를 공급하는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를 계획했다. 고속도로가 교외와 도시를 연결하고 자동차 산업이 발전하면서 교외 주택은 순식간에 미국의 표준이 됐다.
하지만 레빗타운은 백인에게만 허락된 사회적 계층화와 분열의 상징이라는 오명도 안고 있다. 레빗이 집을 먼저 짓고 그 뒤에 집을 살 사람을 찾는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연방주택관리국(FHA)과 재향군인관리국(VA) 덕분이다. FHA와 VA는 레빗 같은 대규모 주택 건설업자들이 개발 비용 거의 전액을 은행에서 대출받을 수 있도록 보증할 권한이 있었다. 단, 이 같은 정부 자금 지원에는 단서가 있었다. 흑인에게 주택을 팔지 않겠다는 약속하에서만 가능했다.
미국 주거·교육의 불평등 문제에 천착해 온 현대사 연구자인 저자는 미국의 고질적 인종 차별 문제가 인종별 거주지 분리 문제에서 비롯됐다고 봤다. 그리고 이 차별적 주거 환경을 만든 것은 백인과 흑인 사이의 사적 관행이 아닌 주정부와 자치정부, 연방정부의 인종 차별적 공공 정책이다.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된 '부동산, 설계된 절망'에서 저자는 부동산으로 인한 불평등 심화의 배경을 의도적 정부 시책에서 찾는다. 흑인이 '게토'에 격리된 것은 '사실상(de facto)' 흑인 분리가 아닌 '법률상(de jure)' 차별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주거지 분리는 생활뿐 아니라 교육, 소득 수준의 불평등을 키웠다.
저자는 이에 대한 증거로 뉴욕주 레빗타운뿐 아니라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만안 지역 등 다양한 사례를 제시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샌프란시스코 리치몬드 지역 인구는 5년 사이에 4배 가까이 늘었다. 군수산업 일자리를 찾아 이주해 온 흑인 노동자들의 유입 때문이다. 연방정부는 주택난을 해결하려고 공영주택을 지었지만 노골적 인종 차별적 주택 공급 방식을 취했다. 흑인에게는 허술하게 지어진 조선소 부지 인근의 집을, 백인에게는 내륙 쪽에 견고하게 지은 주택을 내줬다. 백인은 그마저도 정부 자금 지원을 받아 교외에 영구 주택을 지을 수 있게 되면서 공영주택을 버리고 떠났다. 저자는 "미국에서 자유롭고 포용적 지역으로 꼽히는 샌프란시스코 만안 지역에서 연방정부와 주정부, 지방자치체가 백인과 흑인 동네를 구분하는 인종 차별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면, 다른 대도시에서도 적어도 그만큼의 강도로 인종 차별 정책을 시행하고 있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각급 행정부는 물론 의회와 사법부까지도 국가 재건 과정에서 흑인 분리 정책에 동참했다는 주장이다.
연방정부 인종 배제 정책의 역사는 20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미 연방정부는 공산주의 발흥을 막으려고 주택 소유를 권했다. 노동부는 '자기 집을 소유하라'는 캠페인을 전개했다. 여러 사업장을 장식한 200만 부 넘는 관련 포스터와 신문 광고에는 모두 백인 부부나 가정의 이미지만 담겼다.
저자는 현재는 노골적으로 흑백 주거 구역 분리를 촉진하는 정책이 존재하지 않지만 정부 정책은 여전히 흑백 주거 구역 분리를 묵인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20세기 중후반 공공시설과 대중교통, 투표, 고용과 관련한 인권평등법과 함께 주거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도 제정됐다. 하지만 경제적 여력만 되면 흑인도 교외 지역의 집을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공정주거법' 통과만으로 고착화된 인종 차별적 상황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과거 FHA와 VA가 백인 하위 중산층에 제공한 대출을 통해 조성된 흑인과 백인의 경제적 차이는 이미 영구화됐다.
미국의 인종 문제에 집중한 책이지만 정부 주도 도시 개발로 주거지가 위계화된 현실은 한국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균형 발전'을 명분으로 입지, 교통, 학군 등 인프라 지원이 집중된 서울 강남은 넘볼 수 없는 '그들만의 리그'가 됐다. 부동산이 부의 대물림과 불평등 고착화의 중요 수단이라는 점도 미국의 흑백 경제 격차와 닮은꼴이다. 책 말미에 붙인 해제에서 '세습 중산층 사회'의 조귀동 작가는 "도시 공간의 배분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뤄지고, 기득권의 이해관계가 반영되는지에 대한 분석은 한국인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부분"이라며 "도시의 공간 구조에는 '자본의 논리'만이 아닌 '정치적 결정 과정'이 큰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