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게임사의 증인, 김정주 세상 떠나
세계 최초의 온라인 게임 등 '개척자' 역할
확률형 아이템 논란 등 숙제도 남겨
고(故) 김정주 창업자가 세운 넥슨에서 보유한 '최초' 타이틀은 상당하다. 온라인 게임이란 개념조차 생소했던 1994년 서울의 작은 오피스텔에서 시작한 넥슨이 연 매출 3조 원 규모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굴곡진 'K게임' 역사의 한켠엔 언제나 김 창업자가 자리했다.
김 창업자의 평가는 엇갈린다. 일각에선 게임산업의 리더로서 신산업 등 미지의 세계를 끈임없이 개척했던 긍정적인 몽상가로 기억된다. 하지만 국내 온라인 게임 업계의 해묵은 문제로 지목된 '확률형 아이템' 최초 도입 논란 등은 부정적인 시각으로 남아 있다.
온라인 게임의 역사와 함께 성장... 국내기업 최초 일본 상장
2일 정보기술(IT) 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27일 미국 하와이 체류 중 사망한 김 창업자에 대해선 "한국 게임산업의 기둥이자, 게임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긍정적인 시선이 지배적이다.
우선 그의 손에서 잉태된 넥슨은 1996년 세계 최초의 온라인 게임 ‘바람의 나라’를 만든 국내 게임산업의 인큐베이터로 통한다. 인터넷 확산을 확신한 김 창업자는 게임에 네트워크성을 부여, '바람의 나라'를 출시했다. '바람의 나라'를 컴퓨터(PC) 통신으로 즐겼던 소수의 불만 전화에도 귀를 기울이면서 게임 업그레이드에 나섰던 넥슨의 소통 문화는 유명하다.
김 창업자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공격적인 인수합병(M&A)과 해외진출 전략 등은 국내 후발 게임업계의 본보기로 각인됐다. 2004년 '메이플스토리' 개발사인 위젯스튜디오에서부터 2008년 '던전앤파이터'를 만든 네오플과 2010년 '서든어택'을 개발한 게임하이 등을 차례로 인수하면서 몸집 불리기에 나섰던 넥슨은 국내 최대 게임사로 올라섰다.
넥슨의 경쟁력은 해외에서도 확인됐다. '던전앤파이터'의 중국 시장 성공에 힘입어 넥슨은 2011년 당시 국내 게임사에선 처음으로 연 매출 1조 원을 돌파했다. 상승세를 탄 넥슨은 그해엔 국내 기업 가운데선 처음으로 까다롭기로 소문난 일본 증시에도 상장됐다. 소니와 닌텐도 등 유명한 글로벌 게임 기업이 많았던 일본 현지 분위기가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해외 상장은 필수적이다"고 공언해 왔던 김 창업자의 지론이 현실에서 반영된 셈이다.
ESG 경영도 한 박자 빨리... 국내 최초 어린이재활병원에 200억 쾌척
기업경영 측면에서도 김 창업자는 남들과 다른 길을 갔다. 그는 일찌감치 최근 대세로 자리매김한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에 관심을 보였다. 넥슨은 2006년 지주회사 체제를 빠르게 도입,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투자에만 집중했고 넥슨 재팬이나 넥슨 코리아 등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겼다. 2019년엔 국내 다수의 대기업과 달리 "자녀에게 경영권을 승계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넥슨의 적극적인 사회공헌활동도 잘 알려져 있다. 김 창업자는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에 관심이 많았다. 넥슨은 국내 최초 아동전문 재활병원인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 등을 건립하는 데 200억 원을 기부했고, 이후 전국 각지의 어린이병원 설립에 총 500억 원 이상을 쾌척했다. 김 창업자 또한 재단 측에 매년 자비로 3억~5억 원 규모의 발전기금을 기부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세계 최초 확률형 아이템 도입... '페이 투 윈' 논란의 시작
다만 '최초'라는 수식어 뒤에선 어두운 그림자도 따라왔다. 넥슨에게 부정적인 의미로 붙여진 '돈슨(돈+넥슨의 합성어)'이란 별명에서 알 수 있듯, 넥슨은 과도한 상업성을 띠면서 게이머들로부터 '공공의 적'으로 불렸다. 최근 국내 게임업계를 도마에 올린 확률형 아이템을 최초로 만든 업체가 바로 넥슨이다.
넥슨은 2004년 일본에서 서비스 중이던 '메이플스토리'에 최초의 확률형 아이템인 '가챠(뽑기) 포 티켓'을 판매했다. 티켓을 자판기에 넣으면 무작위(랜덤) 아이템이 나오는 방식이었다. 넥슨은 확률형 아이템을 2005년 한국 시장에도 출시했고, 이후 다른 게임사들도 유사한 방식의 비즈니스 모델을 채택했다. 이후 '확률형 아이템'은 국내 게임 시장에 만연했다. 매월 정해진 요금을 내는 정액제 모델에서 부분 유료화 모델로의 전환도 넥슨이 최초였다.
유료 아이템이 게임 승부의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페이 투 윈(Pay to win)' 논란도 넥슨이 시초다. 온라인 캐주얼 게임인 '크레이지 아케이드'에서 판매된 '바늘' 아이템은 자신의 캐릭터가 물풍선에 갇혔을 경우, 임의로 탈출할 수 있게 해 게임의 룰을 파괴했다는 비판까지 나왔다.
지난해 유료 아이템의 확률 조작 논란으로 크게 이슈가 됐던 게임 또한 넥슨의 메이플스토리였다. 당시 게이머들은 넥슨 본사 앞에서 '트럭시위'를 벌이며 변화를 촉구했다. 2018년 서든어택에서의 확률 조작으로 한 차례 시정명령을 받았던 넥슨에 대한 분노가 오프라인에서 표출된 모양새였다. 해당 논란으로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는 김 창업자에게 출석을 요구했지만 해외 체류를 이유로 불출석했다.
온라인·모바일 게임에만 올인... 한국 게임 한계 비판 자초
일각에선 투자와 M&A로 몸집 불리기에 주력해 온 넥슨의 자체개발 능력에 의구심도 보낸다. 넥슨을 비롯한 국내 대표 게임사들이 부분유료화 모델과 확률형 아이템, 캐주얼 게임과 모바일 게임 중심으로 사업전략을 펼치면서 이후 한국 게임시장의 컴퓨터(PC) 패키지와 콘솔 분야가 사실상 사장되기도 했다. 모바일과 온라인 게임이라는 한국 게임산업의 한계를 이야기하면서 넥슨의 책임론이 언급되는 배경이다.
위정현 한국게임학회 회장 겸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는 "김 창업자는 한국 게임업계에서 넥슨이 가지는 무게에 부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며 "일찍이 도입한 전문경영인 체제가 오랜 시간 안정되면서 게임사업에서는 큰 문제가 없겠지만, 넥슨의 비전과 미래전략 차원에서는 통찰력이 있는 김 창업자의 부재가 뼈아플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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