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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의 성희롱 신고했더니 자기가 '셀프징계', 이게 말이 되나요?

입력
2022.03.03 04:30
수정
2022.03.03 13:5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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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월급쟁이의 삶은 그저 '존버'만이 답일까요? 애환을 털어놓을 곳도, 뾰족한 해결책도 없는 막막함을 <한국일보>가 함께 위로해 드립니다. '그래도 출근'은 어쩌면 나와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노동자에게 건네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담습니다.


직장 성희롱 행위자가 법인대표일 경우에도 사내 징계만 가능하다. 대표가 대표 스스로를 징계하는 '셀프징계' 문제가 발생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직장 성희롱 행위자가 법인대표일 경우에도 사내 징계만 가능하다. 대표가 대표 스스로를 징계하는 '셀프징계' 문제가 발생한다. 게티이미지뱅크


#. 대표한테 결재를 받으러 갈 때였어요. 처음엔 악수로 시작하더니 손에 뽀뽀를 하더라고요. 갑자기 껴안거나 목에 뽀뽀를 한 적도 있어요. 회사 규모가 작아서 대표와 계속 얼굴을 보면서 일해야 하거든요. 더 이상 견디기도 어렵습니다. 대표가 재력도 상당하고 인맥도 좋은 사람이에요. 신고해도 제대로 처리될지 너무 무서워서 고민이 됩니다. (A씨·여성)

#. 대표가 회식 후 억지로 마사지숍에 데려갔어요. 건전한 곳 같아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앞에서 옷을 갈아입으라고 하고 가슴 못 본 게 아쉽다고 했어요. 너무 수치스러워서 눈물만 났습니다. 법인이지만 작은 회사라 사장이 그만둘 순 없으니 제가 회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B씨·여성)

#. 대표 성추행으로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넣었는데 성희롱 사실은 인정되었지만, 법 위반 사실은 없다는 통보를 받았어요. 가해자의 성희롱 사실을 확인해서 가해자를 징계하라는 시정지시를 내렸고, 회사에선 가해자를 징계했다고 했으니 법 위반 사실이 없다는 거예요. 알고 보니까 대표가 자기 월급 10% 빼고 입금하라고 했대요. 이걸 감봉 징계가 이뤄진 거라고 본 거죠. 이렇게 형식적인 징계를 보고도 어떻게 고용노동부는 법 위반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C씨·여성)

#. 대표한테 성희롱을 당해서 고용노동부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담당자가 법인대표는 사업주가 아니라 상급자래요. 그래서 과태료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설명을 하더라고요. 상급자 성희롱으로 진정을 하면 사업장에 고용노동부가 시정지시를 내리고 회사가 시정조치를 하면 종결된대요. 시정조치를 만약 안 하면 법인에다가 과태료 500만 원 이하를 적용한다던데… 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D씨·여성)

성희롱 4명 중 1명이 사장, 그중 절반이 '법인대표'

성희롱 행위자별 분포2018년 1월~2020년 7월 상담 기준, 단위: %
서울여성노동자회


A, B, C, D씨가 일터에서 겪은 일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성희롱 행위자가 '법인대표'라는 점이죠. 인사권을 쥐고 있는 대표에 맞서는 것 자체가 부담이 돼 A씨와 B씨처럼 신고 자체를 꺼리거나 스스로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문제제기를 했다가 오히려 따돌림이나 업무배제 등 부당한 처우를 받았다는 사례도 접수됩니다.

실제 서울여성노동자회 상담실인 '평등의 전화' 상담창구가 받은 직장 내 성희롱 신규 상담(2018년 1월~2020년 7월) 중 사장 성희롱은 전체의 25.3%를 차지하는 205건이었어요. 이 중 법인기업인지 개인기업인지 알 수 없는 사업장을 제외하고 행위자가 법인대표였던 경우가 114건이나 됩니다. 법인대표에 의한 성희롱 피해가 결코 적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죠.

더 큰 문제는 '고용노동부 진정'이라는 적극적인 조치에 나선 C씨와 D씨가 겪은 일입니다. 법상 문제가 없다거나 과태료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 걸까요?

사장 성희롱 중 법인대표·개인사업주 분포2018년 1월~2020년 7월 상담 기준, 단위: %
서울여성노동자회


법인대표는 '사업주' 아닌 '상사'라는 맹점

남녀고용평등과 일ㆍ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제12조(직장 내 성희롱의 금지)
사업주, 상급자 또는 근로자는 직장 내 성희롱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제14조(직장 내 성희롱 발생 시 조치)
누구든지 직장 내 성희롱 발생 사실을 알게 된 경우 그 사실을 해당 사업주에게 신고할 수 있다.
-제39조(과태료)
사업주가 제12조를 위반하여 직장 내 성희롱을 한 경우에는 1,0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한다.

'남녀고용평등법'은 직장 내 성희롱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성희롱이 발생하는 경우 누구든지 '사업주'에게 신고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죠. 그럼 '사업주'가 성희롱을 했다면요? 즉시 조치로 1,000만 원 이하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사업장이 아니라 법인이라면 고용노동부는 법인의 대표를 사업주로 보지 않습니다. 법인사업체의 사업주는 '법인 그 자체'로 봐요. 법인에는 이사나 주주들도 있으니 대표가 사업주만큼 회사 결정을 혼자 내릴 수 있을 정도의 권한은 없다고 보는 거죠.

그래서 법인대표는 사업주가 아닌 '상급자'로 해석합니다. 호칭이 사장님이건, 대표님이건, 회장님이건, 피해자 입장에선 최고 권력자라는 점에선 다르지 않지만, 유권해석을 거치면서 법인대표는 즉각 조치를 할 수 없는 상급자 즉 '상사'가 되는 거예요.

상사의 성희롱은 고용노동부가 회사 내부 규정에 따라 징계하도록 시정지시를 합니다. 소규모 사업장인 경우 내부 규정이 세밀하게 구성돼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죠. 처리 과정에서 대표의 입김이 작용할 가능성 역시 높습니다. C씨 사례처럼 본인 월급을 본인이 10% 깎는 '셀프징계'로 사건 처리가 끝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는 이유입니다.

내부 징계 '감시' 수단 최대한 활용해야

고용노동부 '직장 내 성희롱 예방·대응 매뉴얼' 표지. 고용노동부 제공

고용노동부 '직장 내 성희롱 예방·대응 매뉴얼' 표지. 고용노동부 제공


유권해석이 달라지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 피해자가 할 수 있는 조치는 내부 징계가 형식적인 조치에 끝나지 않고 제대로 이뤄지도록 감시하는 일입니다. 적어도 법인체가 되려면 인사위원회나 징계위원회 마련 등과 같이 최소한의 취업 규칙을 지켜서 신고해야 한다는 점, 회사에서 성희롱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규정한 남녀고용평등법 14조와 고용노동부가 정한 '직장 내 성희롱 예방·대응 매뉴얼'이 있다는 점을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우선 성희롱 대응 매뉴얼에는 '성희롱 심의위원회'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위원회 구성을 할 때 전문성, 대표성, 독립성, 공정성, 집행력을 담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돼 있죠. '예컨대 인사담당임원, 노동조합 대표자 또는 대리인, 직장 내 성희롱 고충담당자, 외부 전문가 등으로 구성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보통 외부 전문가가 참석할 수 있다는 점을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이 매뉴얼을 활용해 전문 상담기관 담당자가 위원회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면 도움이 될 겁니다.

남녀고용평등법 14조는 회사 조치 과정에서 성희롱 발생 사실을 알게 된 경우 지체 없이 사실 확인을 위한 조사를 해야 하고, 조사 과정에서 피해 근로자가 성적 수치심 등을 느끼게 해선 안 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또 피해 근로자를 대상으로 하는 인사조치나 성과평가에서의 부당한 대우, 집단 따돌림 등도 금지합니다. 피해자가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하는 조항이 있다는 걸 꼭 명심하세요.

남녀고용평등법 제14조 주요 내용

- 사업주는 성희롱 발생 사실을 신고한 근로자 및 피해근로자 등에게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불리한 처우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1. 파면, 해임, 해고, 그 밖에 신분상실에 해당하는 불이익 조치
2. 징계, 정직, 감봉, 강등, 승진 제한 등 부당한 인사조치
3. 직무 미부여, 직무 재배치, 그 밖에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인사조치
4. 성과평가 또는 동료평가 등에서 차별이나 그에 따른 임금 또는 상여금 등의 차별 지급
5. 직업능력 개발 및 향상을 위한 교육훈련 기회의 제한
6. 집단 따돌림, 폭행 또는 폭언 등 정신적ㆍ신체적 손상을 가져오는 행위를 하거나 그 행위의 발생을 방치하는 행위
7. 그 밖에 신고를 한 근로자 및 피해근로자 등의 의사에 반하는 불리한 처우

국회서 멈춘 개정안… 법 바꿔야 사각지대 해소

근본적인 해결은 법 개정일 것입니다. 개인사업주와 별반 다르지 않은 권력을 행사하는 법인대표인데도 상급자로만 해석해 교묘히 법망을 피해 가는 사각지대를 막아야 하죠. 상급자 성희롱은 회사 내부 징계로 해결하도록 한다는 틀이 있는 한, 셀프징계로 면죄부를 주고 객관적이고 공정한 판단을 흐리게 하는 현실을 고치기엔 한계가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송옥주 더불어민주당 의원 외 15명이 처벌 대상에 법인 대표와 친족을 추가하는 남녀고용평등법 개정안을 공동발의했습니다. 우선 양벌 규정부터 손 봐서 처벌 대상에 포함시키는 방향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통과되지는 않았습니다. 서울여성노동자회는 올해는 꼭 법이 개정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더 큰 목표는 남녀고용평등법상 직장 내 성희롱 예방과 금지의무 규정의 주체를 '사업주'에서 '사용자'로 확대하는 것입니다. 현재 근로기준법의 경우는 주체를 사용자로 정하고 있습니다. 사업주뿐 아니라 사업 경영 일반에 관해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 대외적으로 사업을 대표하고 업무상 명령이나 지휘감독 등을 하는 권한과 책임이 있는 사람까지 포괄하는 것이죠. 직장 내 성희롱에 관해서도 주체 개념을 사용자까지 넓힐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회사 생활을 하며 말 못 할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해결책이 궁금하시다면 누구라도 제보를 해주세요. 이메일(119@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에 소개됩니다.

한국여성노동자회

※한국여성노동자회(대표번호 1670-1611)는 전국 11개 지부(서울·인천·부천·전북·광주·안산·부산·마산창원·대구·수원·경주)에서 '평등의전화' 상담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성차별과 성희롱을 비롯해 임금체불, 부당해고, 출산이나 육아를 이유로 하는 불리한 대우, 폭언·폭행 등 여성 노동자가 직장에서 겪는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을 도와줍니다.


정리= 맹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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