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자기 길을 가는 사람, 정말로 아는 사람, 쉬지 않고 앞서가는 사람이었다."
방민호 문학평론가는 26일 별세한 이어령 선생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3주 전 고인을 찾아 뵈었다는 방 평론가는 27일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3월에는 아무래도 세상을 떠날 것 같다고 고인이 말씀하셨지만, 그때 기력으로는 몇 년이라도 더 버티실 것 같았는데 이렇게 떠나실 줄은 몰랐다"며 아쉬워했다.
교육자, 행정가, 문화기획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지만 그에 앞서 고인은 무엇보다 한국 문학계에 또렷한 발자국을 남긴 문학평론가였다. 방 평론가는 "고인은 1차 전후 문학기에 있어 가장 중요한 비평가"라며 "새로운 세대의 비평가로서 기성세대와는 다른 전후 현실을 바탕으로 시대에 맞는 진취적인 목소리를 냈다"고 설명했다.
서정주와 김동리 시인 같은 문단의 거목들과 맞서고 김수영 시인과도 논쟁을 벌였던 고인은 "'순수문학' '참여문학' 이항대립에 갇히지 않은 '제3의 길'을 걸은 평론가였다"고 방 평론가는 말했다. 고인이 걸은 제3의 길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문학사상과 이상문학상이었다. 방 평론가는 "문학 자체의 자율성에 기반한 동시대적이고 세계적인 문학 논의를 선도해간 것이 이어령이었고, 그 유산이 훗날 국문학 연구의 산실이 되었다"며 "문학평론가로서의 이어령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문학계만큼이나 고인의 주요 발자취가 찍힌 곳이 교육계다. 이화여대에서 오랫동안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1991년 문화부 초대 장관 시절 문화부 산하의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설립을 이끌며 예술인 양성에 기여했다. 지난해 제9대 한예종 총장으로 취임한 김대진 총장은 올해 한예종 개교 30주년을 맞아 지난달 고인을 찾았다.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이면서 1994년부터 한예종에서 수많은 음악가를 길러온 김 총장은 이 만남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털어놨다.
"학교 설립에 관한 여러 비하인드 스토리를 그날 들려 주셨지만,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건 '미래'에 대한 말씀이에요. 특히 '창의력'에 관한 말씀이 지금 한예종의 교육 방향과 정확히 맞아떨어져서 놀랐어요. 예전에는 예술 교육이 모범적인 것을 모델로 삼았다면 이제는 더 이상 모범적인 것은 필요 없고 각자의 개성이 드러나고 오리지널리티가 표출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덕목이라고 말씀하셨죠. 또 하나는 메타버스 같은 발전하는 테크놀로지와 예술과의 결합, 융복합 예술에 관한 거예요. 저희 세대만 돼도 그런 주제는 따라가기가 힘든데, 그보다 몇 세대 앞서 계신 이어령 선생께서 미래까지 내다보시는 것을 보며 교육자로서 반성이 되더군요. 저희에게 앞으로 30년의 비전을 남겨두고 가신 것 같아요."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 외에도 장관 재임 시절 고인은 국립국어연구원(현 국립국어원) 발족, 경복궁 복원 계획 수립 등 문화행정가로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당시 한 인터뷰에서 고인은 장관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아무것도 없는 빈 벌판에 집을 세우러 가는 목수"라고 말한 적이 있다. "목수는 집을 짓는 사람이지 새집에 들어와 사는 사람은 아니다"라며 "문화부의 네 기둥을 세워놓고 떠나면 그때 이 집 주인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도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한국 문화 발전을 이끈 고인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했다. 황 장관은 "제가 장관에 취임한 후 가장 먼저 찾아 뵌 분은 이어령 전 장관님이었다"며 "그날 제게 해주셨던 소중한 말씀은 고인의 유지처럼 다가왔다"고 말했다. 이어 “이어령 전 장관님은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서 우리나라 문화정책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도록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셨다”며 “생전에 늦지 않게 금관 문화훈장을 드릴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다행스럽고 감사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고인의 장례는 문화체육관광부장(葬)으로 엄수된다. 이날 문체부에 따르면 장례위원회는 황 장관이 위원장을 맡고 부위원장은 김현환·오영우 차관이 맡는다. 장례위원으로는 전직 문체부 장관(이민섭·주돈식·김영수·송태호·신낙균·박지원·김한길·남궁진·김성재·이창동·정동채·김명곤·김종민·유인촌·정병국·최광식·유진룡·김종덕·조윤선·도종환·박양우) 및 문화예술기관장(유희영 대한민국예술원 회장·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김현모 문화재청장·서혜란 국립중앙도서관장·김은미 이화여대 총장·최규학 문화회 회장) 등이 참여한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