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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회사는요, 저희 나라는요

입력
2022.02.27 22: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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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언어를 다루는 일을 하다 보니 적어도 글을 쓸 때는 비표준어나 외래어는 줄이면서 바르고 고운 말부터 나오도록 하지만, 늘 그럴 수는 없다. 이미 다들 많이 쓰는 말은 딱딱한 표준어보다 실제 어감을 더 잘 살릴 수도 있다. 언어는 나빠지는 게 아니고 변할 뿐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지금은 올바르지 않은 말이라도 언젠가는 인정받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기준과 원칙은 있어야겠기에 표준어나 맞춤법, 규범 문법이 꼭 필요할 때는 잘 지켜야 좋다. 그래서 예전에 많이 쓰던 말들이 사라지거나 어법이 흐트러지는 걸 보면 아쉬움도 느낀다.

하지만 그저 내가 듣거나 보기 싫다고 남들의 언어를 평소에 시시콜콜 물고 늘어질 수는 없다. 누가 틀린 말을 쓰거나 맞춤법이 틀렸을 때도 그 자리에서 딱 집어 고쳐 주지는 않는다. 그러면 서로서로 민망할 수 있으니 웬만하면 삼간다. 말이 헛나갔다든가 오류나 오타라는 걸 둘 다 알아채고 함께 웃어넘길 상황이라면 얘기해도 되겠지만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느낌도 다를 테니 그때그때 봐가면서 하면 된다.

요즘 한국어는 경어법이 점점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이를테면 '커피 나오셨습니다'처럼 사물을 높이거나, '저한테 물어보세요'를 '저한테 여쭤보세요'로 존대의 대상을 헷갈리거나, '우리'의 낮춤말 '저희'를 무분별하게 사용한다. 그런데 '저희'는 자기가 속한 무리를 이르는 낮춤말이라서 듣는 이를 배제한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직원이 상사에게 '저희 회사'라고 하거나, 동료 직원들끼리 '저희 점심에 뭐 먹죠?'라는 식으로 잘못 말할 때도 많다.

1인칭 복수 대명사(우리/저희)가 둘인 한국어와 비슷하게, '포함'의 우리(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함께하는 우리)와 '배제'의 우리(듣는 이를 빼는 우리)를 달리 일컫는 언어도 있다. 인도네시아어, 타갈로그어, 하와이어 등 오스트로네시아 어족에서 많이 나타난다. 인도네시아어 kita(키타)는 포함, kami(카미)는 배제의 우리를 일컬으므로 우리말 '저희'는 얼추 kami에 대응한다. 이런 언어들은 두 대명사를 잘 가려서 쓰는 편이다. 한국 드라마나 영화의 인도네시아어 자막을 보면 원어인 한국어에서 포함의 '우리'를 '저희'로 잘못 말할 때도 번역은 포함의 우리(kita)로 잘 나온다.

사람들이 '저희'를 잘못 쓰는 걸 실제로도 왕왕 듣는다. 그 자리에서 고쳐주기는 아무래도 겸연쩍을 테니 내가 말하면서 은근슬쩍 '우리'를 두어 번쯤 다시 집어넣는 소극적 저항으로 망가져 가는 우리말을 지키곤 한다. 언젠가는 꿈에서도 그랬다. 어떤 사람이 "저희 오늘 할 일이 어쩌고저쩌고…" 하길래 내가 "우리가 오늘 할 얘기는… 우리가 이러저러해서…"로 응수했다. 꿈이라면 외계인도 나와야 더 재밌을 텐데 또 지구인과 만나서 어법이나 따지니 좀 아쉽다.

'저희' 오남용은 예민해진 사회에서 상대방에게 조금이라도 트집 잡히지 않으려는 과도한 방어기제와 더불어, '저희나라' 지적이 널리 퍼진 탓도 있다. 한국인끼리 '저희나라'라 하면 잘못인데 나라를 낮추면 안 된다고 얘기하니 '우리나라' 빼고는 다 '저희'로 써도 괜찮다고 여기는 이도 적지 않을 듯하다.

이제 며칠 지나면 대선이다. 겉으로는 낮추는 듯해도 알고 보면 좀스럽게 '저희'만 챙기는 사람보다는 통 크게 '우리' 모두를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기를 빌어본다.




신견식 번역가·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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