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 아옌데 '바다의 긴 꽃잎'
1939년 9월 3일. 2,200명의 스페인 망명자들을 태운 위니펙호가 칠레 발파라이소 항구에 도착했다. 한때는 아프리카로 화물을 운송했고 1차 세계대전 때는 군대를 호송했던 5,000톤짜리 낡은 배가 스페인 내전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긴 이들을 싣고 칠레라는 새로운 희망에 도착한 것이다.
1936년 스페인 국민진영이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공화진영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키며 시작된 스페인 내전은 50만 명이 숨지고 스페인 전 국가를 초토화시킨 뒤 1939년 4월 1일 국민진영의 승리로 끝난다. 내전은 끝났지만 이로 인해 발생한 수만 명의 난민들을 받아주는 나라는 없었다. 프랑스는 난민들을 수용소에 가뒀고 미국과 소련 역시 등을 돌렸다.
그런 난민들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준 국가가 바로 칠레였다. 칠레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스페인 난민을 공식적으로 받아주었으며 그 규모 역시 최대였다. 칠레 정부는 난민들에게 영주권을 보장했고, 시민들은 물론 정부 관계자들까지 발파라이소에 도착한 난민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이사벨 아옌데의 최신작이자 스무 번째 소설인 ‘바다의 긴 꽃잎’은 바로 이 이야기를 다룬다. 스페인 내전과 이후 파시즘 광풍을 피해 칠레로 떠난 한 가족이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이어가는 긴 여정을 그린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것은 수용소에서 의사로 일하는 빅토르 달마우와 그의 제부이자 아내가 되는 로세르다. 빅토르는 동생이 전쟁 중 사망하자 동생의 아이를 밴 로세르와 함께 가족이 되어 칠레에 정착하게 된다. 책은 빅토르와 로세르가 각각 험난한 피란길에 오른 과정을 보여주는 1부, 둘이 가족이 되어 칠레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나가는 2부, 사회주의 변혁과 군사 쿠데타 등 격변하는 칠레 정치 상황에 휩쓸리게 되는 3부로 나뉜다. 1938년 내전 한복판에서 시작해 1994년 빅토르가 여든 살로 사망하기까지 55년여간의 이야기가 전쟁과 사랑, 가족과 고향에 대한 장대한 서사시로 펼쳐진다.
작가에 따르면 주인공 빅토르는 실존인물이다. 아옌데는 후기에서 베네수엘라에 망명 중이던 빅토르 페이로부터 이 이야기를 들었다고 밝힌다. 그러나 빅토르 일가만큼이나 소설에서 인상적인 인물은 칠레의 민중 시인이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파블로 네루다다. 위니펙호에 승선할 난민 선별 과정에서 처음 만난 네루다와 빅토르는 이후 오랫동안 우정을 나누게 되고, 이 우정은 빅토르가 칠레 정치 격변에 휘말리게 되는 원인이 된다.
책에서 묘사되는 네루다의 행적 역시 대부분 실제 있었던 일들이다. 스페인 내전 당시 마드리드 영사를 지내고 있었던 네루다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외교관이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파시즘 규탄에 앞장선다. ‘죽은 민병대원 어머니들에게 바치는 노래’라는 시를 써서 공화파 집회에서 낭송했고 ‘내 마음속 스페인’이라는 시집을 출간해 내전을 겪은 스페인 사람들에게 위로를 선사하기도 했다.
1939년 전쟁이 끝난 뒤에는 스페인 난민들이 프랑스 수용소에서 고초를 겪고 있단 소식을 듣고 이를 칠레 대통령에게 전했으며, 이들을 칠레로 데려오는 프랑스 주재 특별영사에 자원했다. 칠레 정부로부터 단 1페소도 지원받지 못했기에 네루다는 직접 기금을 모으고 배를 구해야 했다. 소설의 제목이 된 ‘바다의 긴 꽃잎’ 역시 네루다가 1954년 이탈리아로 망명 갔을 당시 고국을 향한 그리움을 담아 쓴 시 ‘언젠가 칠레’의 한 대목에서 따온 것이며, 소설의 각 장을 여는 시 모두 파블로 네루다의 시들이다.
그리고 역사는 여전히 반복된다. 러시아가 연일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공 위협을 고조하면서 전쟁 공포는 점차 현실화되고 있다. 국경 지역 주민 수만 명은 고향을 떠나 피란 행렬에 올랐다. 전쟁의 명분에 대해서는 국제 정치 역학과 군사적 이해관계가 거론된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명분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결국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과 삶의 터전을 빼앗는 일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무엇도, 승리조차
끔찍한 피 웅덩이는 지우지 못할 것이다.
파블로 네루다 ‘내 마음속 스페인’(1937) 중 ‘모욕당한 대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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