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시 피해 가명 사용, 입증 난관
대만 문서, 유전자 검사로 확인
후손이 끊긴 줄 알았던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의 증손들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이 공식 확인됐다. 이 선생 서거 88년 만이다. 1910년 독립운동을 위해 다섯 형제와 함께 전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향한 이 선생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청산리대첩 승리의 발판을 만드는 등 일제강점기 무장투쟁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국가보훈처는 23일 “이석영 선생의 장남인 이규준 선생이 온숙, 숙온, 우숙 세 딸을 뒀고, 이들의 자녀 가운데 10명이 살아 있다”며 “확보한 자료와 유전자 검사 결과를 종합해 10명을 후손으로 심의, 의결했다”고 밝혔다.
그간 이 선생의 직계후손을 찾지 못했던 건 장남이자 독립운동을 했던 이규준 선생이 30대 초반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규준 선생의 요절로 세 자매도 뿔뿔이 흩어져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다. 중국 일대를 떠돌았던 첫째와 둘째는 우여곡절 끝에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막내 우숙씨는 대만에서 현지 장교와 결혼했다.
손녀들도 ‘이석영의 후손’임을 굳이 드러내지 않았다. 독립운동가 후손은 3대까지 연금과 각종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이들은 조용히 지냈다. 그러다 숙온씨의 딸이자 이 선생의 증손녀인 김용애(87)씨가 유공자 신청을 하기로 뒤늦게 마음을 바꿨다. 지난해 5월 처음 열린 이석영 선생 순국 87주기 추모식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선생이 직계후손이 없어 그간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는 내용을 보고 크게 낙담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진 자료 외에 후손임을 증명할 서류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독립운동가들이 일제 감시와 탄압을 피하기 위해 가명을 주로 사용한 탓에 제적등본 어디에도 친부가 ‘이규준’으로 기록되지 않은 것이다. 딸이라 세 자매의 이름은 집안 족보에도 올라가지 않았다.
실마리는 대만에서 풀렸다. 대만 한인회의 협조로 현지에 거주했던 우숙씨의 호적등기부에서 아버지가 이규준으로 명기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대만도 한국처럼 유교국가라 정부가 호적등기부를 관리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숙씨는 숨졌지만 그의 자녀와 용애씨를 비롯한 한국의 증손들은 유전자 검사를 의뢰했고, 모두 동일 모계혈족임이 확인됐다.
수십 년 동안 주인을 찾지 못했던 이석영ㆍ이규준 선생의 서훈도 가족 품으로 돌아가게 됐다. 정부는 1991년 이석영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2008년 이규준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으나 유족이 없어 이회영 선생(이석영 선생 동생)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이 대리수훈해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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