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하이 이즈 히어 -하(下)' 발매
공개 사흘 만에 재생 수 1,000만 건 돌파
산전수전, 올해 데뷔 20년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희망 됐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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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데뷔한 힙합그룹 에픽하이 멤버인 미쓰라(왼쪽부터), 타블로, 투컷. 올해 데뷔 20년을 맞은 투컷은 "우리를 보면 희망이 생긴다는 뮤지션들의 말이 고마웠다"고 말했다. 아워즈 제공
그야말로 날벼락 같은 통보였다. 래퍼 타블로(이선웅·42)는 새 앨범 '에픽하이 이즈 히어-하(下)' 공개 닷새를 앞둔 지난 9일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신작 관련 언론 간담회를 비롯해 예정된 일정을 줄줄이 취소했다. 타블로는 본보에 "증상은 경미했는데, 자가격리 해지된 뒤에도 며칠 동안은 집에만 있었다"며 "앨범 발매일에 멤버들과 함께하지 못한 건 처음이었고, 그래서 미안하더라"고 말했다. 타블로 코로나 완치 뒤인 지난 주말, 그와 투컷(김정식·41), 미쓰라(최진·39) 등과 서면을 통해 에픽하이를 만났다.
타블로가 '선인장'이 된 이유
타블로의 확진에도 에픽하이는 새 앨범을 14일 예정대로 냈다. 신곡들은 세계 최대 음원 사이트인 스포티파이에서 불티나게 재생됐다. 공개 사흘 만에 총 재생수는 1,000만(약 1,087만) 건을 넘어섰다. 해외에서 에픽하이의 '한국산 힙합'을 K팝 아이돌 음악처럼 즐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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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음원사이트인 스포티파이에서 힙합그룹 에픽하이의 새 앨범 '에픽하이 이즈 히어-하'에 실린 음원이 공개 후 사흘 간 재생된 수치. 타블로 사회관계망서비스 캡처
2003년 1집 '맵 오브 더 휴먼 솔' 발매 후 올해로 데뷔 20년. 에픽하이는 새 앨범에 20년의 흔적을 눌러 담았다. "첫 계약은 500에 3년, 첫 숙소 500에 30만" "음악보다 더 고민했던 먹고사는 일." 에픽하이는 수록곡 '프리퀄'에서 이렇게 랩을 하며 초라했던 데뷔 시절로 타임머신을 돌린다.
상처도 빠뜨리지 않는다. 타블로는 타이틀곡 '그래서 그래'에서 "세상이 내게 삼키게 했던 가시 수백 개를 몸 밖으로 밀어내다 선인장이 됐네"라고 랩을 툭 내뱉는다. 타블로는 근거 없는 학력 위조 의혹으로 조직적으로 난타당했고, 그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그런 흉터를 지닌 타블로는 앨범 마지막에 실린 '샴페인'에서 "마음 아픔도 굳은살이 돼 내 마음이 될 테니"라고 읊조린다.
"흉터는 말 그대로 몸의 일부가 된 상처잖아요. 안 좋았던 일들을 그저 잊으려고 하지 않고 나 그리고 우리의 일부로 삼아 새로운 힘으로 만들려고 해요. 상처를 잘 아는 사람들이니까,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알아보고 위로해주고 싶기도 하고요."(타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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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에픽하이. 집단 혐오 세력을 꼬집는 '본 헤이터'를 부른 래퍼들은 모두 아버지가 돼 '가족관계증명서'란 랩을 한다. 아워즈 제공
펼치면 '十' 모양...에픽하이가 띄운 '부모님 전 상서'
미쓰라는 '에픽하이 이즈 히어' 시리즈 앨범 녹음을 하다 갑자기 녹음실을 뛰쳐나갔다. 공황장애였다. 미쓰라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 인간관계의 어려움, 음악 작업에 대한 부담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 같다"고 했다.
이렇게 역경을 딛고 나온 에픽하이의 새 앨범 표지엔 두 마리 새가 날갯짓을 하고 있다. 투컷은 "이제 다시 희망을 가질 때였으면 좋겠다란 생각으로 희망찬 날개를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에픽하이 이즈 히어' 상·하 합본 앨범을 펼치면 열 십 자(十) 모양이 된다. 팬데믹으로 인한 갈등과 분열의 시대, 공존과 평화의 중요성을 십자가로 시각화한 것으로 보인다.
마녀사냥, 혼란 그리고 절망 속에 잃고 얻은 가족. 이런 순간을 겪으며 에픽하의 음악에도 살이 붙었다. "그가 양보해준 젊음이 숨 쉬고 있어". 이런 가사가 흐르는 '가족관계증명서'는 어느덧 모두 아빠가 된 에픽하이가 이 세상 모든 부모에 띄운 전상서다. "가족관계증명서를 떼면 세상을 떠난 가족은 '사망'이라고 나오잖아요. 그래서 가족관계증명서가 필요할 때마다 떼러 가는 게 너무 싫었어요. 그 단어가 너무 차갑고, 공허해서. 그 마음을 담아 곡을 썼어요."(타블로)
에픽하이는 데뷔곡 '플라이'로 시작해' '우산' '러브러브러브' '본 헤이터' '레슨2' '원' '1분1초' 등 히트곡을 꾸준히 내 사랑받았다. 문학적인 가사로 정평이 난 에픽하이는 힙합그룹 중 손꼽히는 '비트 메이커'이기도 하다. 감미로운 전자 기타 연주('그래서 그래')와 재즈풍의 음악('BRB')으로 에픽하이는 새 앨범에서 랩의 서정을 한껏 돋운다. 요즘 '힙'한 래퍼 원슈타인과 합작한 '슈퍼 레어'에선 에픽하이 특유의 찰진 비트가 랩의 감칠맛을 더한다. "유행과 상관없이 에픽하이만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와 멜로디, 비트가 반가운 앨범"(김성환 음악평론가)이란 평이다. 에픽하이가 힙합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투어를 하고, 현지 최대 음악 페스티벌인 '코첼라'에 올해(4월 15~24일)를 비롯해 한국 가수 중 유일하게 세 번 초대받은 배경이다.

힙합그룹 에픽하이 새 앨범 '에픽하이 이즈 히어-하' 표지. 아워즈 제공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게 희망 됐으면"
이렇게 오랫동안 사랑받은 힙합그룹은 데뷔 20년을 맞아 '에픽하이가 여기 있다'는 문장을 기둥 삼아 연작 앨범을 2년에 걸쳐 냈다. 세 '힙합 아재'들은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20년 동안 우리가 여전히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희망이 됐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데뷔한 해에, 아니면 5년이 지났을 때 그리고 역경을 겪을 때마다 포기했다면,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불가능했을 테니까요."(미쓰라)
"내달 1일 시애틀에서 시작, 20여 개 지역에서 진행될 북미 투어와 코첼라 무대를 위해 곧 미국으로 떠나요. 가족에겐 미안하지만, 오랜만에 관객을 만나는 만큼 즐겁게 하려고요. 한국 관객들은 5월 13~15일 서울(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 봬요."(투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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