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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셋, 수어를 배우고서야 나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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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셋, 수어를 배우고서야 나를 찾았다

입력
2022.02.26 15:00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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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인의 고유 언어 수어… '가장 마음 편한 소통법'
공용어 인정됐지만, 농학교조차 '수어 과목' 없어
“수어로 배울 권리 보장하고, 정규과목 지정해야”

지난 10일 서울 강북구에 위치한 대안학교 '소리를 보여주는 사람들'(소보사)의 한 교실에서 농인 교사와 농인 학생이 '책 이야기' 수업 중 수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소보사는 수어를 제1언어로 사용해 한국어(문자)를 비롯해 여러 과목들을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소보사 제공

지난 10일 서울 강북구에 위치한 대안학교 '소리를 보여주는 사람들'(소보사)의 한 교실에서 농인 교사와 농인 학생이 '책 이야기' 수업 중 수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소보사는 수어를 제1언어로 사용해 한국어(문자)를 비롯해 여러 과목들을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소보사 제공

평생 '한글 문자'를 모국어 삼아 살아온 청각장애인 김인선(37)씨는 만 33세가 되던 해, 수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보청기를 쓴 귀로 온갖 애를 쓰며 들을 필요 없이, 눈으로만 봐도 소통이 되는 게 참 신기했다”고 한다. 발음에 신경 쓰고, 상대방의 말소리를 놓칠세라 전전긍긍할 일 없이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던 그날의 경험은 그에게 공감, 위안, 격려, 자신감, 생소함, 놀라움으로 한데 밀려왔다.

그는 "앞으로 제일 편하게 쓰고 싶은 것은 수어"라며 "어릴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수어와 구화(말하기)를 동시에 학습하는 다중언어 교육을 받고 싶다"고 했다.

코다맘(35·닉네임)씨는 “구화를 쓰다 수어통역학과로 입학하면서 23세부터 수어를 배웠다. '온전한 나 그대로'를 봐준 대학 생활은 유토피아 같았다”고 회상했다. 초·중·고 12년 내내 알아듣지 못할 수업 시간에 '앉아 있는 연습'을 했던 그는, 대학에서 처음 문자통역으로 수업을 받으며 공부의 재미를 발견했다. 그에게 수어는 ‘가장 마음 편히 소통할 수 있는 언어’이고, 자녀에게 응당 물려줘야 할 '내 정체성'이다.

'안녕하세요'를 뜻하는 수어. 왼손은 주먹을 쥐고 팔을 편 상태에서 오른쪽 손바닥으로 왼쪽 팔을 쓸어내린다. 그리고 양쪽 손을 가볍게 주먹 쥐고, 가슴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동작을 취한다. 국립국어원 캡처

'안녕하세요'를 뜻하는 수어. 왼손은 주먹을 쥐고 팔을 편 상태에서 오른쪽 손바닥으로 왼쪽 팔을 쓸어내린다. 그리고 양쪽 손을 가볍게 주먹 쥐고, 가슴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동작을 취한다. 국립국어원 캡처

사회는 청각장애인에게 수어 교육보다 '듣고 말하기'를 우선 가르친다. 청각 보조 장치로 듣고, '언어치료'를 거쳐 청인(듣는 사람)처럼 소통하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2020년 교육부 특수교육통계’에 따르면 전체 청각장애 학생 중 20%만 특수학교로, 78%는 일반학교(특수학급 22%·일반학급 56%)로 진학했다. 청각장애 학생들을 위한 농학교조차 보통 입말로 수업이 이뤄지고, 교과 과목에 수어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건복지부의 ‘2020년 장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청각장애인 중 12%만이 ‘의사소통을 할 만큼 수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답했다. 국립국어원 ‘2020년 한국수어 활용 조사’에서는 제1언어를 수어라고 답한 사람은 절반(54.2%)이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보청기, 인공와우(달팽이관)를 쓴다 해서 '청인처럼' 듣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토로한다. 한 당사자는 "항상 영어 듣기 평가를 하는 느낌”이라고 묘사했다. 음성언어로 소통하는 매 순간,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는 거다.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지난해 12월 29일 충남 공주시 공주대학교 옥룡캠퍼스에서 열린 공주대학교 부설 특수학교 설립 간담회에 참석해 수어로 발언을 하고 있는 김민주 충주성심학교 학생을 바라보고 있다. 공주=왕태석 선임기자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지난해 12월 29일 충남 공주시 공주대학교 옥룡캠퍼스에서 열린 공주대학교 부설 특수학교 설립 간담회에 참석해 수어로 발언을 하고 있는 김민주 충주성심학교 학생을 바라보고 있다. 공주=왕태석 선임기자

“사실 구화냐 수어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청각장애 아동에게 100%로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 있는지가 중요한 거죠. 문제는 (구화가) 아이에게 딱 맞는 옷이 아닌데도 부모님도, 선생님도, 친구들도 다 청인이니 불편해도 ‘그들처럼’ 말하도록 만드는 상황이죠.” ‘소리를 보여주는 사람들’(소보사) 김주희 대표교사의 설명이다.

소보사는 수어를 제1언어로 사용해 농인 아동·청소년과 코다(CODA·청각장애인 부모를 둔 청인) 아동을 교육하는 대안학교다. 14일 서울 강북구 소보사 학교 입구로 기자가 들어서자, 한 교사가 눈을 맞추며 수어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학생은 10명, 선생님은 5명이며 청인인 김 대표를 제외한 선생님들은 모두 농인(한국수어를 일상어로 쓰는 청각장애인)이다. 아이들은 본격적인 '국영수 공부'에 앞서 ‘일대일 맞춤형 수어 교육'으로 기초를 다진다.


2020년 2월 소보사 교사들과 유아반 학생들이 함께 찍은 단체 사진. 소보사는 학생이 10명, 선생님이 5명이다. 신입생마다 수어를 전혀 모르는 아이, 구화와 수어를 반반으로 하는 아이 등 사용하는 언어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선생님이 학생과 일대일로 붙어 '수어 실력'을 끌어올리는 데 공을 들인다. 소보사 제공

2020년 2월 소보사 교사들과 유아반 학생들이 함께 찍은 단체 사진. 소보사는 학생이 10명, 선생님이 5명이다. 신입생마다 수어를 전혀 모르는 아이, 구화와 수어를 반반으로 하는 아이 등 사용하는 언어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선생님이 학생과 일대일로 붙어 '수어 실력'을 끌어올리는 데 공을 들인다. 소보사 제공

김 대표는 “‘난 다 들리고, 말도 다 하는데’라고 생각해서 일반학교에 들어갔다가 또래 관계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학업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도 많다”면서 “‘나는 뭐지. 듣는 사람인가, 잘 못 듣는 사람인가’라며 혼란을 느낀다”고 안타까워했다.

'어떤 언어로도 100% 생각과 마음을 표현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아이들에게 같은 언어(수어)를 쓰는 형, 언니, 이모, 삼촌, 할머니가 함께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주는 것이 소보사의 또 다른 역할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얼마만큼 잘할 수 있는지 '자존감'을 확인해야 그 힘으로 공부도 하고, 꿈도 찾고, 일도 하는 거잖아요. 아이의 존재 자체를 인정해 주지 않는 과도한 치료적 접근이나 재활은 오히려 아이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어시인(視人·보는 사람)'이라는 필명을 쓰는 김인선씨의 '얼굴 이름(수어 이름)'. 평소 필기하며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 그의 습관을 담아 농인 교사가 선물로 만들어준 이름이다. 농인들은 '한글 이름'과 별개로, 농사회에서 사용되는 수어를 이용한 '얼굴 이름'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를 지칭할 때마다 일일이 지화(한글 자음·모음을 나타내는 수어)를 조합하는 것보다, 훨씬 간편하기 때문이다. 김인선씨 제공

'수어시인(視人·보는 사람)'이라는 필명을 쓰는 김인선씨의 '얼굴 이름(수어 이름)'. 평소 필기하며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 그의 습관을 담아 농인 교사가 선물로 만들어준 이름이다. 농인들은 '한글 이름'과 별개로, 농사회에서 사용되는 수어를 이용한 '얼굴 이름'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를 지칭할 때마다 일일이 지화(한글 자음·모음을 나타내는 수어)를 조합하는 것보다, 훨씬 간편하기 때문이다. 김인선씨 제공

김인선씨는 “2016년 한국수화언어법 제정으로 수어가 공용어로 인정되면서 수어 교육원 설립, 수어 교원 확대 등 진전도 있었지만, 농인 아동·성인 성장기별 수어 교육 체계는 아직 부족하다”며 “특수학교에 농 문화와 역사를 알고, 수어를 가르칠 수 있는 전문적인 교사가 배치돼야 하며, 전국 모든 초·중·고교에서도 수어를 정규 과목으로 지정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나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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