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인의 고유 언어 수어… '가장 마음 편한 소통법'
공용어 인정됐지만, 농학교조차 '수어 과목' 없어
“수어로 배울 권리 보장하고, 정규과목 지정해야”
평생 '한글 문자'를 모국어 삼아 살아온 청각장애인 김인선(37)씨는 만 33세가 되던 해, 수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보청기를 쓴 귀로 온갖 애를 쓰며 들을 필요 없이, 눈으로만 봐도 소통이 되는 게 참 신기했다”고 한다. 발음에 신경 쓰고, 상대방의 말소리를 놓칠세라 전전긍긍할 일 없이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던 그날의 경험은 그에게 공감, 위안, 격려, 자신감, 생소함, 놀라움으로 한데 밀려왔다.
그는 "앞으로 제일 편하게 쓰고 싶은 것은 수어"라며 "어릴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수어와 구화(말하기)를 동시에 학습하는 다중언어 교육을 받고 싶다"고 했다.
코다맘(35·닉네임)씨는 “구화를 쓰다 수어통역학과로 입학하면서 23세부터 수어를 배웠다. '온전한 나 그대로'를 봐준 대학 생활은 유토피아 같았다”고 회상했다. 초·중·고 12년 내내 알아듣지 못할 수업 시간에 '앉아 있는 연습'을 했던 그는, 대학에서 처음 문자통역으로 수업을 받으며 공부의 재미를 발견했다. 그에게 수어는 ‘가장 마음 편히 소통할 수 있는 언어’이고, 자녀에게 응당 물려줘야 할 '내 정체성'이다.
사회는 청각장애인에게 수어 교육보다 '듣고 말하기'를 우선 가르친다. 청각 보조 장치로 듣고, '언어치료'를 거쳐 청인(듣는 사람)처럼 소통하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2020년 교육부 특수교육통계’에 따르면 전체 청각장애 학생 중 20%만 특수학교로, 78%는 일반학교(특수학급 22%·일반학급 56%)로 진학했다. 청각장애 학생들을 위한 농학교조차 보통 입말로 수업이 이뤄지고, 교과 과목에 수어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건복지부의 ‘2020년 장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청각장애인 중 12%만이 ‘의사소통을 할 만큼 수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답했다. 국립국어원 ‘2020년 한국수어 활용 조사’에서는 제1언어를 수어라고 답한 사람은 절반(54.2%)이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보청기, 인공와우(달팽이관)를 쓴다 해서 '청인처럼' 듣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토로한다. 한 당사자는 "항상 영어 듣기 평가를 하는 느낌”이라고 묘사했다. 음성언어로 소통하는 매 순간,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는 거다.
“사실 구화냐 수어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청각장애 아동에게 100%로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 있는지가 중요한 거죠. 문제는 (구화가) 아이에게 딱 맞는 옷이 아닌데도 부모님도, 선생님도, 친구들도 다 청인이니 불편해도 ‘그들처럼’ 말하도록 만드는 상황이죠.” ‘소리를 보여주는 사람들’(소보사) 김주희 대표교사의 설명이다.
소보사는 수어를 제1언어로 사용해 농인 아동·청소년과 코다(CODA·청각장애인 부모를 둔 청인) 아동을 교육하는 대안학교다. 14일 서울 강북구 소보사 학교 입구로 기자가 들어서자, 한 교사가 눈을 맞추며 수어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학생은 10명, 선생님은 5명이며 청인인 김 대표를 제외한 선생님들은 모두 농인(한국수어를 일상어로 쓰는 청각장애인)이다. 아이들은 본격적인 '국영수 공부'에 앞서 ‘일대일 맞춤형 수어 교육'으로 기초를 다진다.
김 대표는 “‘난 다 들리고, 말도 다 하는데’라고 생각해서 일반학교에 들어갔다가 또래 관계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학업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도 많다”면서 “‘나는 뭐지. 듣는 사람인가, 잘 못 듣는 사람인가’라며 혼란을 느낀다”고 안타까워했다.
'어떤 언어로도 100% 생각과 마음을 표현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아이들에게 같은 언어(수어)를 쓰는 형, 언니, 이모, 삼촌, 할머니가 함께하는 '공동체'를 만들어주는 것이 소보사의 또 다른 역할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얼마만큼 잘할 수 있는지 '자존감'을 확인해야 그 힘으로 공부도 하고, 꿈도 찾고, 일도 하는 거잖아요. 아이의 존재 자체를 인정해 주지 않는 과도한 치료적 접근이나 재활은 오히려 아이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인선씨는 “2016년 한국수화언어법 제정으로 수어가 공용어로 인정되면서 수어 교육원 설립, 수어 교원 확대 등 진전도 있었지만, 농인 아동·성인 성장기별 수어 교육 체계는 아직 부족하다”며 “특수학교에 농 문화와 역사를 알고, 수어를 가르칠 수 있는 전문적인 교사가 배치돼야 하며, 전국 모든 초·중·고교에서도 수어를 정규 과목으로 지정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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