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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를 업고 선 '리벳공 로지'의 딸

입력
2022.02.21 04:30
수정
2022.02.21 17:09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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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a Brodyaga(1940.9.21~2021.10.28)

미국 텍사스 난민-이민법 변호사 리사 브로디야가는 1981년 미국 최초 이민-난민 지원 공익 로펌 '프로옉토 리베르타드'를 설립해 1970년대 말부터 숨질 때까지 약 10만 명의 중남미 난민-이민에게 무료 법률 서비스를 제공했다. 난민 다수는 미국 정부가 지원한 군부독재정권의 탄압에 쫓겨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온 이들이었다. 브로디야가는 그들에게 새 삶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미국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국가윤리이며, 국가범죄에 대한 보속이라 여겼다. 국경 인근에 그가 꾸린 난민 캠프(리오그란데 피난처)에서 그의 반려자 겸 동료인 잔 언더우드가 촬영한 사진. Jan Underwood, NYT

미국 텍사스 난민-이민법 변호사 리사 브로디야가는 1981년 미국 최초 이민-난민 지원 공익 로펌 '프로옉토 리베르타드'를 설립해 1970년대 말부터 숨질 때까지 약 10만 명의 중남미 난민-이민에게 무료 법률 서비스를 제공했다. 난민 다수는 미국 정부가 지원한 군부독재정권의 탄압에 쫓겨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온 이들이었다. 브로디야가는 그들에게 새 삶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미국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국가윤리이며, 국가범죄에 대한 보속이라 여겼다. 국경 인근에 그가 꾸린 난민 캠프(리오그란데 피난처)에서 그의 반려자 겸 동료인 잔 언더우드가 촬영한 사진. Jan Underwood, NYT

미국 화가 노먼 록웰(Norman Rockwell, 1894~1978)이 1916년부터 63년까지 주간지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SEP, 현재 격월간지)’에 그린 322점의 일러스트는 양차대전과 전후 미국의 역사와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1943년 5월 전몰자 추도일(memorial day) 기념호 표지 그림 ‘리벳공 로지(Rosie the Riveter)’도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였다.

세상에 등장한 '멍든 눈의 소녀'

10년 뒤인 53년 5월 23일자 SEP 표지를 장식한 건 그의 유화 작품 ‘멍든 눈(The Shiner)’이었다. 뭔가 말썽을 부려 교장실에 불려간, 한쪽 눈이 시퍼렇게 멍든 초등학생 소녀. 두 가닥 땋은 머리는 엉클어져 댕기는 신발끈과 함께 반쯤 풀려 있고, 양말도 제멋대로 흘러 내려가 있다. 빼꼼 열린 문 사이로 교장의 표정은 근엄하고 담임으로 보이는 교사도 자못 심각한 얼굴이지만, 소녀는 아랑곳 않고 의기양양 웃음을 참고 있는 눈치다. 살짝 추켜 세운 어깨의 각도에선 승자의 기개와 자부심마저 느껴진다. 아마도 소녀는 못된 급우를 혼내줬을 테고, 혼자 불려온 걸 봐서는 싸움의 양상이 일방적이었던 듯하다. 하지만 기죽지 않은 태도는 으레 싸움의 승패가 아니라 명분에서 비롯된다. 어쩌면 소녀의 상대는 짓궂은 남자아이(들)였을지 모른다. 치맛단 사이로 언뜻 보이는 드레싱 거즈는 소녀의 전력도 짐작케 한다.

전후 미국 사회의 번영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체제를 맞이하며 중산층 중심의 소비문화로 만개했다. 남부를 진앙지로 한 흑인 민권운동과 반차별 시민운동도 그 에너지와 무관치 않았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62년의 일이니 냉전의 냉기는 아직 일상에 본격적으로 스미기 전이다. ‘멍든 눈의 소녀(Girl With Black Eye)’라고도 불리는 작품을 저 시점에 발표한 까닭을 록웰이 명시적으로 밝힌 적은 없다. 다만 전시를 견뎌 낸 ‘리벳공 로시’의 딸이 전세대의 소녀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조금은 선언적으로, 예언적으로 말하고자 했으리라 짐작될 뿐이다. 스웨덴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말괄량이 삐삐’ 연작 첫 책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1945)’이 미국서 번역 출간된 게 1950년이었다.

노먼 록웰의 1953년 작품 '멍든 눈의 소녀'. nrm.org

노먼 록웰의 1953년 작품 '멍든 눈의 소녀'. nrm.org

일리노이주 어배너(Urbana)의 만 12세 소녀 리사 브로디야가(Lisa Brodyaga, 1940.9.21~ 2021.10.28)도 록웰의 저 그림을 보고 눈동자를 반짝이던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소녀를 향한 동경, 심리학적 동일시는 성인이 된 뒤로도 지속됐다. “어머니는 항상 그림 속 소녀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곤 했다”던 아들(Paul Mockett Jr.)의 회고에 따르면 그렇다.

미국 최초 난민 법률 지원조직 출범

60,70년대 반전-반문화 운동과 페미니즘을 양분 삼아 성장해 변호사가 된 그는 81년 멕시코 국경 텍사스 최남단으로 내려가 중앙아메리카에서 건너온 망명 난민과 이민자를 위한 미국 최초 난민-이민 법률지원조직 ‘프로옉토 리베르타드(Proyecto Libertad, Project Liberty)’를 설립했다. 그의 싸움 상대는 80~90년대 엘살바도르와 과테말라 니카라과 독재 권력이었고, 그 권력을 후원한 미국 레이건-부시 행정부였다. 현지 권력의 탄압을 피해 목숨 걸고 국경을 건너온 난민-이민자를 막아서는 국경경비대와 이민국 공무원이었고, 미국 정부를 대리한 검찰이었다.

한 법률인권단체 관계자는 “브로디야가만큼 열정적으로, 멋지게 잘 싸우는(good fight) 변호사는 내 평생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의 활약은 눈부셨고 연방 및 주정부 당국은 그를 ‘가시같은 존재’라 여겼다. 그의 로펌은 현장에서 이민법 소송 실무를 익히려고 찾아오는 로스쿨 학생 및 자원봉사자들로 늘 북적였다. 그가 젊은 이민법 (예비)변호사들에게 가장 힘주어 당부한 것도, 록웰의 ‘소녀’처럼 "법정에서 연방 정부를 상대하는 걸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는 거였다.

만 40년간 약 10만 명에 이르는 난민에게 무료 법률서비스를 제공하고, 난민 쉼터를 겸한 공동체를 꾸려 평생 그들과 함께 살았던 미국 이민법 소송의 전설 리사 브로디야가가 지난해 10월 별세했다. 향년 81세.

난민 쉼터는 리사 브로디야가의 거처이기도 했다. 그는 법정에 서거나 불법 이민자 면담 등이 없을 때는 임시 거주자들과 함께 저 곳서 농사를 지었다. 한 동료 활동가(Pio Celestino)와 함께 선 리사. Jan Underwood, NYT

난민 쉼터는 리사 브로디야가의 거처이기도 했다. 그는 법정에 서거나 불법 이민자 면담 등이 없을 때는 임시 거주자들과 함께 저 곳서 농사를 지었다. 한 동료 활동가(Pio Celestino)와 함께 선 리사. Jan Underwood, NYT

토질학자 아버지와 교육자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브로디야가는 아버지가 연구 목적으로 마련한 일리노이 주 시골 농장서 4남매와 더불어 흙에 뒹굴다시피 하며 성장했다. '말괄량이 리사'는 60년대 시민-학생운동과 반문화운동에 몰두하며 뉴욕서 블랙팬서스 활동에도 가담했고, 유럽 여행 중 체코에서 반소비에트 시위 대열 선두에 섰다가 깃발을 든 사진이 찍혀 미국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오리건 주 리드 칼리지와 보스턴 인근 브랜다이스대에서 러시아문학과 물리학을 공부했고, 63년 미국으로 순회공연 온 모스크바 서커스단 통역사로 일하며 서커스를 배우려 한 적도 있었다. 59년 결혼해서 아들 하나를 낳은 뒤 3년 만에 이혼했고, 아이는 전남편이 키웠다. 취직 걱정 장래 걱정을 심각하게 하지 않아도 괜찮던 세대였다. 그렇게 좌충우돌 떠돌던 시절 그는 자기 이름을 러시아어로 ‘방랑자(wanderer)’를 뜻한다는 ‘브로디야가’로 개명했다. 본명은 게일 엘리자베스 스미스(Gail Elisabeth Smith)’였다.

그가 조지워싱턴대를 졸업하고 가톨릭대 로스쿨에 진학해 변호사가 된 건 30대 중반이던 74년이었다. 워싱턴D.C에서 변호사로 일하다 말고 캘리포니아 히피들의 코뮨에 들어가 잠깐 산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민자의 나라라 불리지만, 미국 인구 중 이민자 비율은 1890년대 14.8%를 정점으로 60년대 말까지 꾸준히 줄다가 1970년(4.8%)을 기점으로 다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민 행렬의 선두에 섰던 게 동구와 중남미 망명-이민자들이었다. 2018년 현재 미국 인구 중 외국서 태어난 이민자는 약 4,480만 명으로 전체의 13.7%에 이른다.

냉전의 국가 범죄가 양산한 망명자들

1979년 니카라과 혁명이 시작됐고,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 군부 쿠데타와 내전이 본격화했다. 레이건 정부는 우파 군부 독재권력을 지원하며 중미 출신 망명자-난민을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경제적 망명’으로 규정, 사지나 다름없던 본국으로 송환했다. 당시 미국이 인정한 정치적 망명은 공산권 또는 반미 국가로부터 ‘탈출’한 이들이어서, 84년 기준 입국 비자를 발급받은 이들 중 과테말라와 살바도르 출신은 3% 미만인 반면, 이란 출신은 60% 소비에트와 전쟁 중이던 아프간 인은 40%, 폴란드 출신은 32%, 쿠바는 100%였다. 그해 과테말라 출신 망명자 중 입국을 허락 받은 이는 단 한 명이었다.

그 현실에 개입해 망명자들에게 쉼터를 제공하는 이른바 ‘피난처 운동(Sanctuary Movement)’이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시작됐다. 베트남전쟁의 프리즘으로 국가의 실체를 본 그들에게 난민을 돕는 일은 미국이란 국가의 윤리와 책임, 정체성에 대한 심문이자 국가 범죄에 대한 보속(補贖)이었다. ‘린(Linh)’이라는 베트남 6세 고아 소녀를 입양해 함께 지내던 브로디야가가 78년 텍사스 남부로 이주, 3년 뒤 ‘프로옉토 리베르타드’를 설립한 것도 그래서였다.

1980년대 말 국경을 건너와 '프로옉토 리베르타드'의 도움을 받아 망명 신청 혹은 합법 이민 절차를 밟으며 리사의 난민캠프에서 머물던 이들. Jan Underwood, NYT

1980년대 말 국경을 건너와 '프로옉토 리베르타드'의 도움을 받아 망명 신청 혹은 합법 이민 절차를 밟으며 리사의 난민캠프에서 머물던 이들. Jan Underwood, NYT

'프로옉토' 활동 초기부터 브로디야가를 도와 불법이민자 수용소 무급여 조사요원으로 일한 한 활동가는 "극소수 가난한 변호사들 말고는 국경 이민자 수용소에서 어떤 일이 빚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때였다. 교정 시스템 자체가 워낙 은밀한 데다, 시민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먼 변방의 일이어서 법적 감시도 당연히 미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브로디야가는 샌들이나 카우보이 부츠를 신고 길게 땋은 머리를 늘어뜨린 채, 텍사스 농촌 여성들의 전형적인 옷차림으로 법정에 서서 수트 차림의 기세등등한 검찰과 이민국 변호사들을 상대하곤 했다. 무명시절, 브로디야가를 깔보며 히죽대던 이민국 변호사들은 그의 변론이 시작되자마자 서류를 뒤져 반박 거리를 찾느라 고개를 들지 못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그는 텍사스 이민 법정의 전설이 됐고, 90년대 이후부터는 그와 '프로옉토' 변호사들 때문에 이민자 송환절차 등에 병목현상이 빚어지자 텍사스 이민자들을 마이애미 등지로 옮겨 소송을 벌이는 일도 빈발했다고 한다. 80년대 중반 이후 미국변호사협회(ALA)가 그를 인적-물적으로 지원했다.

"덤벼봐, 상대해주지!"

마이애미 대학 로스쿨 강연에서 그는 “사람들이 나를 ‘촌뜨기 변호사(hick lawyer)’라고 깔보는 걸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리곤 록웰 소녀의 기백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덤벼봐, 상대해주지. 날 꺾어봐!(Go ahead, I dare you. Dismiss me!)” 오하이오 주립대 로스쿨 교수 세사르 에르난데스(Carlos Cesar Hernandez)는 “미국 전역의 이민법 변호사들은, 브로디야가를 알든 모르든, 그가 보여준 창의적이고 명석한 소송의 선례와 함께 그의 그림자를 따라 걷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86년 브로디야가는 유엔 국제원주민조약위원회(IITC) 등의 지원을 받아 텍사스 할링전(Harlingen) 교외에18만㎡(약 5만5,000평) 부지를 마련, ‘리오그란데 피난처(Refugio del Riogrande)’를 세웠다. 망명-이민자가 법률지원 서비스를 받는 동안 체류할 수 있는 주거시설과 간이 클리닉을 갖춘 난민캠프였다. '피난처'는 거주자와 스태프 및 자원봉사자들이 소와 닭, 오리와 거위, 에뮤, 리마 등 가축을 기르고 채소와 과일 농사를 지으며 살던 일종의 ‘코뮨’이자, 브로디야가의 집이었다. 피난처 개소식을 소개한 당시 기사는 ‘불법 이민자 수용 등 연방법 위반 여부를 예의 주시할 것’이라는 이민귀화국(INS, 현 USCIS) 관계자의 경고도 함께 실었다.

최대 220명까지 거주한 적도 있다는 ‘피난처’의 일과는 아침 8시부터 정오까지 노동하고, 오후 시간에는 영어와 생업에 필요한 기술을 익히는 거였다. 나머지는 자유시간. 그의 로펌과 피난처는 주로 후원금으로 운영됐고, 급하면 브로디야가도 유료 법률 고객을 받곤 했다. 98년 에세이에서 브로디야가는 ‘피난처’가 겪는 만성 식수난과 여름 모기떼, 지붕 천장에서 날뛰는 쥐들의 소음과 전갈의 위협, 여름에는 에어컨이 없고 겨울 온수도 제한적으로만 쓸 수 있는 어려움 등을 소개하며, 그런 불편을 견딜 수 있을 만큼 각오가 단단한 사람, 스페인어에 능하거나 익히고 싶은 사람이면 누구든 와서 일을 거들어 달라고, "우리의 피난처는 존재 자체로서 항구적으로 평화적인 저항운동"이라고 썼다.

2019년 6월 텍사스 매캘런(McAllen) 국경순찰대 임시 수용시설에 갇혀 있는 불법 이민자들. Office of Inspector General 사진, childrenshealthfund.org

2019년 6월 텍사스 매캘런(McAllen) 국경순찰대 임시 수용시설에 갇혀 있는 불법 이민자들. Office of Inspector General 사진, childrenshealthfund.org


"리사는 웬만한 행성 하나를 구한 셈"

2019년 7월 난민 NGO인권감시단은 텍사스 일원 국경 감시대 수용소 운영 실태를 미 하원 인권소위에서 폭로했다. 활동가들은 10대 미만 아이들이 부모-친지와 격리된 채 매트리스도 없는 새장 같은 곳에서 제대로 씻지도 충분히 먹지도 못하며 3주씩 수용돼 있고, 감기 등을 앓는 아이들도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증언했다. 이민자 아동 돌봄 원칙이 된 1997년 연방 대법원 조정판례 즉 ‘플로레스 합의(Flores Settlement)’에 따르면, 아동의 경우 억압적 조건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친지 등 후원자의 보호를 받아야 하고, 화장실과 물, 식사와 의료서비스를 받으며 적절한 온도와 환기시설을 갖춘 곳에서 지내도록 해야 하며, 기한도 20일을 넘기지 않아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2008년 인신매매 피해자 보호법(TVPRA)은 아동의 경우 부모 없이 72시간 이상 수용소에 머물게 해선 안 된다고 규정돼 있다. 2019년 트럼프 행정부는 이민자 아동의 수용소 유치 기한을 폐지하는 대통령 행정명령을 내렸지만 법원에 의해 저지당했다.

브로디야가는 폐암으로 건강이 나빠진 2019년 이후에도 우간다 정부로부터 고문당해 손가락이 잘린 한 우간다인 목사 겸 인권운동가(Steven Tendo)의 강제송환을 막기 위해 분주히 뛰어 다녔다. 인권 단체들은 그와 '프로옉토'가 도운 난민 불법 이민자만 최소 10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했다. 법률전문 매체 'Courthouse News'는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세상을 구하는 것'이라는 구약 율법서 구절을 인용하며 "그 말이 진실이라면 리사는 웬만한 크기의 행성 하나를 구한 셈이 될 것"이라고 썼다. 미국 이민법 관련 변호사와 로스쿨 학생, 법률 서비스 관련자들의 조합인 '미국 이민 프로젝트'는 지난해 5월, 리사의 공로를 기려 '리사 보르디야가 상'을 제정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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