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기고] 비안 사람 박서생의 꿈 '수차', 하늘로 날아오르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기고] 비안 사람 박서생의 꿈 '수차', 하늘로 날아오르다

입력
2022.02.19 10:00
0 0

첫 목화 재배, 첫 읍지, 컬링 등 '최초'에 강한 의성
수차 향한 박서생의 꿈, 통합신공항으로 실현되길

농촌 하면 드넓게 펼쳐진 논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절반 이상 논이다. 논의 비율이 이렇게 높아진 건 100년 남짓이다. 조선시대만 해도 5분의 1에 불과했다. 논의 면적은 관개 기술이 발달하면서 넓어졌다.

조선시대부터 논은 점점 산으로 갔다. 못자리에서 어느 정도 모를 키워 본논으로 옮겨 심는 '이앙법' 덕분이었다. 모내기가 보급되면서 농업 중심지가 물을 대기 쉬운 산간지역으로 이동한 것이다. 17세기 후반 이래 안동과 예안, 봉화, 영양에서 인재가 대거 배출되고 새로운 문화중심지로 변모한 것도 이러한 농업의 지형도 변화에 기인한다. 산간을 파헤쳐 논밭을 만드는 바람에 비가 많은 계절에 강의 범람이 심각해진 것도 이 때문이다.

많은 물을 확보하기 위해 수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수차(水車)였다. 수차와 관련해 가장 적극적으로 이용했다는 기록은 세종대왕 때 자주 등장한다. 세종은 '농사직설'과 '권농교서'를 편찬하는 등 새로운 농업기술 보급에도 애썼다. 수차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인물은 의성 비안(比安)에서 태어난 박서생이다. 선생은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수차를 보고 임금에게 이를 도입할 것을 건의했다. 수차만 도입된다면 강에 흐르는 풍부한 물을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족을 달자면 의성은 유난히 신문물에 대한 저항감이 없다. 오히려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최초'라는 타이틀을 거머쥔다. 한반도에 수차를 보급하는 역할을 맡은 박서생의 예도 있지만, 그에 앞서 조선 초 대규모 목화 재배지가 의성에 처음으로 꾸려졌고, 최초의 읍지(문소지·1507년)도 의성에서 나왔다. 근래의 일을 보자면, 소에게 마늘을 먹여 특화한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도 그렇거니와 베이징동계올림픽에서 활약하고 있는 컬링팀도 의성에서 탄생했다. 다소 생소했던 컬링을 최고의 인기 종목으로 급부상시킨 원동력에는 신문물에 강한 지역의 전통이 작용했다고 믿는다. 여기에, 대구경북의 번영을 넘어 국가 균형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새로운 시대로의 도약을 이끌 통합신공항도 의성에 자리를 잡는다. 이 모든 일들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생각한다.

박서생의 꿈은 실현되었을까. 안타깝게도 실패했다. 박서생의 시대로부터 수백 년이 흐른 뒤도 마찬가지였다. 서유구(1764∼1845)가 쓴 '임원경제지'에 이런 언급이 남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맞두레를 써서 일일이 물을 대니 마치 모양이 그네와 같아 매우 둔해 웃을 만하다. 종일토록 힘써 일해도 한 두렁도 적시지 못하니 이는 우리나라에 관개용 양수기구가 없다는 말이다.'

수차 보급에 실패한 이유는 기술력 부족이라고 보기 힘들다. 우리나라의 자연 환경과 연관이 있다. 이를테면, 하천의 최소 수량과 최대 수량을 나타내는 수치가 영국 템스강은 8, 프랑스 센 강은 34였다. 반면 한강은 275였다. 월별 강수량의 차이가 너무 커서 수차를 만들어 강둑에 활용하기가 수월치 않았다. 메콩강 유역은 강 위에 바로 집을 지어서 살 수 있을 정도로 수위가 일정하다. 이런 지역이라면 당장이라도 수차를 만들었겠지만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도전이었다.

이중환(1690~1752)도 강보다 시냇가가 농업을 경영하기에 유리하다고 전했다. '강가에 정자를 지으면 지세의 변동이 많아서 흥하고 스러짐이 일정치 않다. 오직 시냇가에 사는 것만이 평온한 아름다움과 시원스러운 운치가 있으며, 물을 대어 농사를 짓는 이로움이 있다.'

조선의 주요 곡창지대는 큰 강가가 아니라 상류지역이나 시냇가 인근의 넓은 들이었다. 그만큼 강물을 이용하기에 힘들었다.

우리나라의 강수 분포가 달라져서 수차가 멋지게 정착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농업 생산성 증대 외에 물류의 활성화라는 효과가 생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논이 산간지역이 아니라 큰 강과 더 가까워졌다면, 수운을 활용한 농업 생산물 유통이 더 활발해졌을 것이다. 수로는 육로와 비교해 비용이 훨씬 저렴했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상주에서 충주까지 이르는 육로를 이용할 때 수송비용이 100이었다면, 녹동강을 거쳐 남해와 서해로 빠지는 물길은 20에 불과했다. 거리만 따지면 다섯 배가 멀었으나 비용이 5분의 1에 불과했다. 육로와 비교해 강을 통한 유통이 수월해졌다면 물자의 생산과 이동, 상업의 발달을 자극하지 않았을까.

농업은 조선 시대 최대의 산업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반도체, 자동차, 조선업에 해당한다. 생산과 유통이 얼마나 밀접한지 곰곰이 생각하면 수차를 향한 박서생의 열망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대구와 경북은 유통에 관한 한 교통오지다. 대구와 구미 등에 있던 알짜 기업과 공장이 수도권으로 옮겨가는 현상도 사실은 불편한 교통 탓이다. 교통과 관련해 기업들이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시설은 공항이다. 공항이 들어서면 생산지와 물류 중심지가 보다 밀착된다. 수도권까지 옮겨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면야 얼마나 많은 기업과 공장이 우리 지역으로 몰려올 것인가.

우리 지역의 청정 농산물도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것이다. 특히 대한민국 최고의 한우 브랜드인 '마늘한우'는 세계로 진출할 길이 열릴 것으로 기대된다. ‘마늘한우’의 세계화가 실현되는 것이다. 바퀴(수차)에 대한 박서생의 염원이 하늘을 나는 바퀴(비행기)로 실현될 것이라고 말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신기하게도 박서생의 고향이 비안이다. 새로운 공항이 들어설 자리다. 박서생의 염원이 하늘에 닿아 후손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우리 지역이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 것이라고 믿고 싶다.

이상문 의성축협조합장

이상문 의성축협조합장



이상문 의성축협조합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