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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의 끝자락에서, 처음을 생각하며

입력
2022.02.17 22: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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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4일(현지시간) 폭설이 내린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전경. 연합뉴스.

지난달 24일(현지시간) 폭설이 내린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전경. 연합뉴스.

비와 바람에 무수히 파인 돌기둥 옆을 그만큼이나 긴 세월에 얼굴 가득 주름 파인 노부부가 서성인다. 오늘 하루가 바쁜 사람들은 재빠른 차를 타고 씽씽 지나가는 도로 옆의 고대 신전. 사방을 둘러싼 번잡한 도시의 시간과는 또 다른 느리고 적막한 시간이 흘러가는 곳이 바로 아테네 시내 한복판,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이다.

다리가 아파진 부부는 버려진 돌무더기에 앉아 17m 높이의 기둥을 한참이나 바라본다. 지금처럼 15개가 아니라 104개 기둥이 온전히 남았을 신전을 상상하는 건지, 아니면 그 기둥 너머의 하늘을 올려다보는 건지, 또 한참 눅진한 시간이 간다. 유난히도 나이 지긋한 여행자가 많은 아테네에서 자주 만나는 풍경이다. 서구문명의 기원에 대한 호기심은 막 인생을 시작해 피 끓는 청춘들보다는, 신전 계단을 오를 때마다 어이쿠 소리가 절로 나는 백발의 여행자에게서 더 뜨겁게 느껴졌다. 마치 생의 끝에서 처음을 다시 되돌아보는 듯이 말이다.

늙었지만 모든 것의 시작인 도시, 그리스 아테네는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처음을 떠올린다. 아테네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아크로폴리스 언덕 아래 디오니소스 극장에서는 서양극예술이 탄생했다. 술과 연극의 신 디오니소스에게 바치는 제전이 열리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연극구경을 하면서 흥청망청 즐겼다는데, 그 연극이 잘 되도록 무대도 만들고 편히 보라고 원형객석도 만든 게 극장으로 발전한 셈이다.

그 언덕 옆에 덩그러니 솟은 바위산은 신화 속 신들이 모여서 투표로 유죄 여부를 가렸다는, 이른바 법정의 출발점이다. 딸의 강간미수범을 죽인 전쟁의 신 아레스가 투표 결과 정당한 복수라며 무죄판정을 받은 후에 ‘아레스의 언덕’이란 뜻의 아레오파고스(Areopagos)로 불렸는데, 고대 아테네의 법질서를 총감독하던 ‘아레오파고스 회의’ 역시 이 언덕에서 유래됐다.

지금은 흙먼지 풀풀 나는 공터지만 수천 년 전에는 사람들이 시끌벅적 흥정을 하고 목에 핏줄을 세워가며 이런저런 토론도 했을 아고라(Agora)는 민주주의가 싹튼 장소다. 허름한 옷을 걸치고 유유자적 이 시장통을 누비며 오묘한 질문을 던졌을 소크라테스를 떠올려보면, 서양문명사의 첫 페이지가 시작된 도시란 말이 결코 과언은 아니다.

그러니 고대올림픽을 되살린 최초의 근대올림픽이 아테네에서 열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행여 전쟁으로 얼룩지진 않을까 내내 걱정이 많았던 이번 올림픽 기간, 새삼 올림픽의 처음이 떠올랐다. 고대올림픽의 주인공인 제우스 신전에서 근대올림픽이 시작된 경기장으로 걸어가는 길에는 작은 문이 하나 서 있다. 그리스문화 ‘덕후’였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신시가지를 만들며 세운 문인데, 신전이 잔뜩 모인 아크로폴리스 방향으론 신화 속 영웅인 ‘테세우스의 오래된 도시‘ 그 반대 방향으론 ‘이곳은 테세우스의 도시가 아니라 하드리아누스의 도시’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어찌 보면 황제의 오만한 문구지만 나는 ‘과거가 신의 영역이었다면, 미래는 인간의 영역’이라는 선포로 읽혀졌다. 고대올림픽이 신의 가호를 바라는 것이었다면 근대올림픽은 그것을 인간 스스로 재현하겠다는 의지가 아니었을까? 잠시라도 공통의 가치를 가지고 함께 모여서 화합을 꿈꾸어 보는 것. 평화일지, 공존일지, 적어도 다가올 미래만큼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으니 말이다.

전혜진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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