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디 A. 월러슨 ''싸구려의 힘'
코로나19 '집콕' 영향으로 집 안 물건 정리에 몰두하게 됐다는 이들이 많다. 온라인엔 '쓸모없는 물건을 왜 값싸다고 덥석 샀을까' '언젠가 쓸 줄 알고 기어코 받아낸 증정품은 왜 몇 년째 그대로 있을까' '그토록 소중히 모았던 수집품이건만, 물건에 담긴 이야기는 왜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 걸까' 식의 고백이 넘쳐난다.
값싸고 질 낮은 상품을 지칭하는 '싸구려'가 일상의 일부가 된 탓이다. 기술과 자본에 힘입어 다양한 저가품은 끊임없이 시장에 유입된다. 쓸모와 가치를 따지기 전에 어느새 지갑부터 열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는 모습은 익숙한 풍경이 됐다. 미국 럿거스대 역사학 교수 웬디 A. 월러슨은 이처럼 만연한 저가품 소비 현상의 의미를 오랜 역사적 맥락에서 찾는다. 그는 우리말로 '쓰레기'로 풀이되는 '크랩(Crap)'이라는 제목으로 재작년 출간된 책을 통해 미국이 소비의 나라가 된 배경을 탐색한다. 최근 '싸구려의 힘'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돼 나온 책은 미국의 소비문화를 미시적 차원에서 접근한 역사서다.
책은 18세기 중반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가전 기기, 균일가 잡화점 상품, 증정품, 수집품 등 여러 범위의 상품을 예로 들어 미국 사회가 싸구려 상품을 받아들이게 된 역사를 되짚는다.
저자가 생각하는 크랩은 특정 유형의 물건보다는 물건의 성질을 뜻하는 말이다. 저렴하거나 품질이 낮은 상품뿐 아니라 취향과 시장 상황에 따라 어떤 물건이든 크랩이 될 수 있다.
책에 따르면 저가품 시장의 태동은 18세기 중반 행상인들의 짐꾸러미에서 비롯됐다. 진기함과 새로움을 앞세운 행상인들의 잡동사니는 상설 잡화점으로 편입됐고 저가품과 소비자 간 거리는 좁혀졌다. 미국인이 크랩 소비를 늘린 데에는 20세기에 등장한 거대한 체인점 형태의 균일가 매장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저자는 특히 혁신과 독창성으로 포장된 각종 기기, 필요 이상의 소비를 유도할 의도로 기획된 증정품, 수집 목적의 장식품과 소품 등을 싸구려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대공황 시기에 억눌렸던 소비 수요가 폭발한 1950년대 미국은 해설적 정보 광고 '인포모셜'이 본격화한 시기다. 희망에 찬 발명가에게 최적화된 홍보 기회였다. 하지만 새로운 기기는 '노동을 줄이는 혁명'이라는 주장과 달리 때로 추가적 노동을 만들어냈다. 가령 '렘브란트 자동 감자 껍질 깎이'는 감자 껍질을 벗겨내기는 했지만 감자가 기기에서 튀어나와 사방팔방에 눌어붙었다.
무차별적인 광고 판촉물은 선의가 아닌 광고 전달의 뚜렷한 목적이 있는 물건이었다. 소비자의 고고한 취향을 뽐낼 수 있도록 돕는 진귀한 장식품이나 소품 역시 소비자의 허영심을 이용하는 크랩이다. 낭만적 역사와 서사를 앞세우지만 대량 생산된 공장제일 뿐이다.
말하자면 저가품 홍보·마케팅의 역사를 소비자의 입장에서 풀어낸 책인 셈이다. 카탈로그, 광고 지면, 팸플릿 등 싸구려의 매력을 알리기 위한 당대의 노력을 담은 100여 컷의 도판도 수록돼 있다. 품질이 형편없거나 쓸모없는 공장제 수집품이 환영받게 한 마케터의 노련한 전략은 소비자 시각에서는 기만과 협잡으로 읽힌다.
저자는 싸구려가 수반하는 비용이 오히려 크다는 현실적 문제도 지적한다. 20세기에 크랩을 만드는 데 선호된 플라스틱과 관련한 제조 공정은 환경에 악영향을 미쳤다. 노동 착취도 싸구려가 발생시키는 '비용'이다. 저가품을 시장에 내놓으려면 저비용의 재료뿐 아니라 적은 마진으로 이윤을 실현할 낮은 임금도 필수적이다.
저자는 저가품이 모든 계층이 양질의 삶에 접근할 수 있게 한 공로는 인정하면서도 저가품을 비판적 시선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모든 계층의 사람에게 현대적인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는 민주화된 권력"으로 저가품이 중요한 만큼, 무심코 사들이는 소비 행위에 대해 좀 더 진지하고 다각적인 시각으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크랩은 개인으로서의 미국인이 누구인지, 사회로서의 미국이 어떤 곳인지를 상징한다"고 적었을 정도로 철저하게 미국 사회를 분석한 책은 미국식 마케팅이 실시간으로 전파되는 한국 사회에 적용해도 무리 없이 공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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