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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한때 다 생명이었다

입력
2022.02.1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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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콜 '작은 종이 봉지의 아주 특별한 이야기'

편집자주

그림책은 ‘마음 백신’입니다. ‘함께 본다, 그림책’은 여백 속 이야기를 통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마음을 보듬어 줄 그림책을 소개합니다. 어린이책 기획자이자 그림책 시민교육 활동가이기도 한 신수진 번역가가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검은색 패딩을 입은 가수 안예은의 왼쪽 팔에 흰 줄이 선명하게 나 있다. 이삿날 실리콘에 몸을 문대다 생긴 자국이라고 한다. 안예인 사회관계망서비스 캡처

얼마 전 싱어송라이터 안예은씨의 트위터에서 팔 한 쪽에 뭔가 묻은 검은 패딩을 입고 찍은 사진을 보았다. 이삿날 실리콘에 몸을 문대다가 생긴 자국이라고 한다. 스타일리스트는 새 걸로 하나 사줄 테니 제발 버리라고 하지만 정작 본인은 "빵꾸 난 것도 오염된 것도 아니므로 그냥 입습니다"라며 태연했다. 인용 트윗으로는 "저게 바로 오염 아니냐"는 의견과 "진정한 힙스터"라는 의견이 분분했다. 나는 이걸 계기로 안예은씨가 더욱 좋아진 쪽이다. 나도 마음에 드는 옷이 찢어지면 자수로 커버하고 오염된 부분에 와펜 같은 것을 붙여서라도 입기 때문이다. 30년 전 재킷도 아직 옷장에 있다. 패스트패션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 옛날 옷들이 훨씬 질이 좋아서 버리자니 아깝기도 하고.

오랜 세월 나를 거쳐간 수많은 옷 중 아직까지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옷이 하나 있다. 예닐곱 살 때 엄마가 뜨개질로 만들어 준 개나리색 멜빵 치마다. 희고 가느다란 물결무늬를 넣고 그 위로 주황색 꽃송이를 자잘하게 붙였던 그 옷은 '멋 내는' 기분을 처음으로 느끼게 해 주었다. 그 옷은 동생들이 물려 입었다가 나중에는 풀어서 다른 옷을 짤 때 썼다. 방금 풀어내 꼬불꼬불한 실은 뜨거운 김을 쐬어서 펴고 색깔별로 작은 실타래를 만들었다. 작아지거나 낡은 편물들이 여러 개의 실뭉치로 변했고, 그걸로 알록달록 무늬를 넣어가며 새 옷을 척척 짜던 엄마는 마술사 같았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낡은 옷을 입고 가면 얼굴을 찌푸리시지만.

코팅 잘된 쇼핑백은 못 버리고 모아 두고, 지퍼백과 포장 비닐 같은 것도 한 번 쓰고 말기를 아까워해서 몇 번이고 씻어 쓴다. 가끔은 "이렇게 아끼면 뭐 하나. 미국 사람들은 나보다 몇백 배는 소비하고 쓰레기도 뒤섞어서 막 버리는데"라면서 한숨을 쉴 때도 있다. 헨리 콜 작가의 '작은 종이 봉지의 아주 특별한 이야기'는 바로 그 '미국 사람'이 종이 봉지 하나를 무려 삼대에 걸쳐서 갖가지 용도로 사용하는 이야기다. (그러니 누구든 싸잡아서 비난하지 맙시다.)

1960년대로 짐작되는 시기, 첫 등교를 앞둔 소년은 아빠와 함께 장을 보고 갈색 종이 봉지에 물건을 담아 온다. 이 봉지는 소년이 샌드위치를 싸 가는 도시락 가방이 되고, 잠 못 드는 밤에는 손전등 위에 씌우는 조명 갓이 되기도 한다. 캠핑용품도 담고, 공구도 담고, 강아지 간식 봉지로도 쓰이던 종이 봉지는 대학에 가서도 기타 악보를 담는 보조 가방으로 쓰이더니 여자 친구와의 데이트에도 함께한다. 청혼의 반지도, 결혼식에서 흩뿌리는 축하의 색종이도 여기 담긴다. 아기를 낳았을 때는 심지어 모빌이 돼 주기도 한다. 맨 처음 종이 봉지를 가져왔던 소년의 아버지는 이제 노인이 돼서 아들네 집에서 보살핌을 받고, 손자와 할아버지는 종이 봉지에 새로운 추억들을 함께 채운다. 이쯤 되면 종이 봉지가 거의 가족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낡을 대로 낡아서 테이프 자국투성이지만, 가족의 역사가 담긴 이 봉지를 어떻게 그냥 버리겠는가.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종이 봉지도 마침내 이들 곁을 떠나는데, 새로운 생명을 품고서 숲으로 돌아간다.

재활용이나 재사용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하고 미화한 이야기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아니다. 책 말미에 실린 작가 노트를 보면 헨리 콜은 1970년 첫 번째 '지구의 날'에 점심을 싸 갔던 종이 봉지 하나를 3년에 걸쳐 700번 정도 사용했고, 대학에 가면서 한 살 어린 친구에게 선물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친구도 그 봉지에 계속 점심을 싸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이 책은 흑백 펜 드로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면지를 펼치면 오직 나무 한 그루만 갈색으로 그려져 있어서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나무가 베어지고 잘게 부서져서 커다란 종이가 되고, 그 가운데서 갈색 종이 봉지가 탄생한다. 작은 봉지 하나를 만드는 데 커다란 나무 한 그루의 생명이 필요했던 것이다. 책장을 넘기면서 어느 순간부터 종이 봉지가 살아 있는 생명체로, 한 식구로 느껴졌다면 제대로 본 것이다. 종이는 애초에 푸르른 생명이었으니까. 우리는 날마다 얼마나 많은 목숨들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지.

수많은 플라스틱 용기와 비닐봉지가 넘쳐나는 시절이다. 비닐과 플라스틱은 정말이지 너무 가볍고 편리해서 이걸 덜 쓰자면 큰 결심이 필요하다. 그래도 장바구니를 챙기고 빵을 담았던 종이 봉지들을 챙겨서 채소와 과일을 담아 온다면, 우리 삶을 위해 몸을 내어준 생명들에 대해 조금 더 귀한 대접이 될 것이다. 펑펑 쓰고 마구 버리는 사람들은 어딘가에 여전히 있겠지만, 뭐든 귀하게 쓰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을 게 분명하다. 적어도 어린이들은 그것이 자신의 미래를 위한 실천이라는 걸 예민하게 알아차리고 있다.

작은 종이 봉지의 아주 특별한 이야기·헨리 콜 지음·비룡소 발행·36쪽·1만3,000원


신수진 어린이책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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