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언 그치지 않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 이행
걸음마 단계 국내 기업 ESG 경영에 시사점
"명확한 목표 세우고 실행에 옮겨야"
프린터가 종이를 인쇄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가 자란다. 종이를 만들기 위해 나무가 쓰이기 때문에 프린트 용지를 사용할수록 나무가, 숲이, 자연이 파괴된다는 상식에 어긋난다. 그럼에도 프린터 작동 소리가 이어질수록 나무는 점점 자라나 숲을 이룬다. 기계음이 멈추고 인쇄가 중단됐다는 이미지가 나오자 숲의 성장도 정지됐다가, 다시 프린터 작동음이 들리자 숲이 울창해지고 생태계가 살아난다.
HP(옛 휴렛팩커드)가 올 1월 초 자사 유튜브 채널에 공개한 ‘나무들을 인쇄한다’(Printing Trees)는 제목의 영상 내용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강조한 일종의 기업 이미지 홍보성 광고다.
재계에선 ‘종이 사용=환경 파괴’라는 상식을 뒤집은 HP 영상이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을 화두로 삼기 시작한 국내 기업들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최근 공공 기관 및 국내 기업들은 탄소중립 등을 주요 어젠다로 설정하고 친환경 정책을 강조하고 있지만, 일부 친환경 행위만 과장하거나 반(反)환경 행위를 축소해 이미지를 ‘녹색’으로 세탁하는 ‘그린워싱’(위장환경주의)이라는 지적도 심심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HP의 역발상 영상이 업계에서 비판이 아닌 긍정적 평가를 받는 건 HP가 사회적 책임 선언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실행에 옮기고 있기 때문이다.
HP는 1940년대부터 이윤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해 왔다. 2001년부터 매년 △인권 △기후 행동 △디지털 형평성 등 부문에서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겠다는 취지의 ‘지속가능한 영향 보고서’를 발표하고 있다. 2019년부터 세계자연기금(WWF)에 1,100만 달러를 지원해 브라질, 중국 등지의 삼림 재건을 후원하고 있고, 100만 그루의 나무를 심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HP가 해당 영상에 ‘누가 과연 종이 인쇄가 나무를 자라게 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HP는 여러분이 인쇄하는 모든 페이지로 숲을 재건한다’고 적어 넣을 수 있는 근거다. 시민단체 기후솔루션 김주진 대표는 “기업의 기후변화 방지 및 환경 보호 노력은 특정 기한 등을 달성하기 위한 명확한 목표를 지향해야 한다”면서 “그것을 실행에 옮길 때 그린워싱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국내 기업들도 ESG 경영을 중요시하고 있지만 아직 걸음마 단계로 보인다. 전국경제인연합(전경련)이 8일 발표한 매출액 300대 기업 대상 ESG 설문에 따르면, 응답한 86개 기업 중 81.4%가 지난해 대비 올해 ESG 사업규모(예산 및 인력기준)를 늘릴 것이라고 답했지만, ESG 전담부서 구성원 업무 경력 기간이 5년 이하인 기업 비중이 93.3%에 달했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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