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태백 4개의 자작나무숲과 마지막 탄광촌
지난달 7일 태백 구와우마을의 한 카페에서 ‘안도현 시인과 함께하는 자작나무숲 문학회’가 열렸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라는 문장만으로도 안도현은 탄광 도시 태백과 가장 어울리는 시인이다. 이 자리에서 그는 백석의 시 ‘백화(白樺)’를 소개했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모밀국수를 삶은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넘어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백석의 시 '백화'
안도현은 ‘자작나무다’로 끝나는 문장이 줄 맞춰 곧게 선 자작나무숲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고 평했다. 태백 산자락 곳곳에 자라고 있는 순백의 겨울나무처럼.
검은 탄광에 자라는 지지리골 자작나무숲
남한에서 대표적 자작나무숲을 꼽자면 밀집도에서 인제 원대리를 따라갈 곳이 없다. 그러나 조림 면적으로만 따지면 태백이 으뜸이다. 정선 고한읍에서 두문동재를 넘으면 산자락 곳곳에 자작나무숲이 보이고 시내로 들어서면 가로수로도 심겨 있다. 시청 주차장 한쪽에도 자작나무 몇 그루가 아담한 쉼터를 형성하고 있다. 약 30년 전부터 심어온 태백의 자작나무가 이제야 조금씩 빛을 발하고 있다.
대표적인 곳은 함백산 자락 황지동 지지리골이다. 왠지 지긋지긋한 가난의 흔적이 묻어나는 지명이다. 이 산골에 살던 화전민들이 ‘지지리도’ 못살아서 이렇게 불렀다는 설이 있지만 태백문화원의 해석은 다르다. 옛날 사냥꾼들이 이 골짜기에서 멧돼지를 잡아 현장에서 구들돌처럼 판판한 돌에 구워 먹었는데 이를 ‘지지리’라 불렀다고 한다. 이를테면 지지리골은 돌판에서 지글지글 멧돼지를 구워 먹던 곳이었다. ‘돼지고기 돌판구이’는 태백이 광산도시로 개발된 이후 더욱 활성화됐고 광부들의 연탄구이로 진화했다.
지지리골 자작나무숲까지는 황지동 ‘하이원태백어린이집’에서 약 3㎞를 걸어야 한다. 산림관리도로(임도)를 따라 가는 완만한 산책로여서 힘든 길은 아니다. 1시간이면 여유 있게 도착할 수 있다. 넓지 않은 계곡 얼음장 아래로 맑은 물소리가 흐르고 주변에는 지지리의 유래가 된 판판한 돌 조각도 널려 있다. 길 양쪽으로 오리나무와 잎갈나무가 숲을 이뤄 호젓하게 걷기 좋은 길이다.
자작나무숲으로 들어서면 오솔길처럼 좁은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높은 산등성이에서 비껴 내리쬐는 햇빛이 숲으로 번지면 하얀 나뭇가지가 아지랑이처럼 눈부시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꿈속으로 들어가는 듯하다. 주변 산이 높고 가팔라 한낮에도 볕이 들지 않는 곳에는 잔설이 쌓여 있다. 바닥도 숲도 온통 새하얀 세상이다.
굵은 자작나무가 눈이 시릴 정도로 하늘 높이 쭉쭉 뻗은 모습을 상상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30여 년 세월이 흘렀지만, 이곳 자작나무는 이제 막 성장기에 들어선 수준이다. 몸집보다 키가 먼저 자라 가느다란 나무들이 다닥다닥 모여 숲을 형성하고 있다. 거센 골바람을 이기지 못한 듯 원줄기도 수직으로 단단하게 서지 못하고 바람 따라 살짝 기울었다. 안도현 시인은 그럼에도 ‘태백에는 자작나무숲이 있다’고 말할 거라 했다. 함경도 사람은 ‘애걔걔’ 하겠지만 부산 사람이 보면 백두산의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지지리골 자작나무숲은 오래전 문을 닫은 함태탄광이 있던 자리에 조성됐다. 공중에서 보면 가파른 산자락에 계단식으로 숲이 형성된 모습이다. 자연 복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숲을 관통하는 계곡에는 한겨울인데도 물소리가 요란하다. 어찌 된 일인지 2020년부터 갱내에서 유출되는 수량이 증가했다고 한다. 계곡물 상류는 우유를 풀어놓은 듯한 에메랄드 빛을, 하류는 녹이 슨 듯 붉은빛을 띤다. 석회와 철 성분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지지리골 초입의 상장동 남부마을은 함태탄광 전성기에 형성된 동네다. 일직선형으로 길고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주택들이 붙어 있다. 좁은 땅에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구조로 사택으로 불렸다. 현재 깔끔하게 정비한 사택 외벽에는 탄광촌의 추억을 돌아보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국내 대표 탄광촌 장성의 마지막 광부
태백을 탄광촌이라 한다면 그 중심은 상장동 아래 장성동이다. 1936년 일제강점기에 채탄을 시작해 한때 40개가 넘던 이 지역 광산은 석탄산업합리화정책을 거치며 현재 2곳만 남았다. 시기가 확정되지 않았지만, 조만간 이마저도 문을 닫을 예정이어서 ‘탄광도시 태백’도 옛말이 될 날이 머지않았다.
“저는 태백이 좋고, 태백에서도 장성, 장성에서도 제 고향 화신촌이 좋습니다. 함께 타지로 나가자고 권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누가 뭐래도 여기서 끝까지 살 겁니다.” 장성동 산자락의 화신촌에서 만난 이진형(47)씨는 고향에 대한 애정과 회한이 교차하는 듯했다.
그는 태백의 ‘마지막 광부’이자 가장 어린 광부다. 아버지에 이어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에 입사해 2대째 탄을 캐고 있다. 들뜬 마음으로 ‘햇돼지 신고식(돼지를 잡아 신입이 선배에게 거하게 한턱 쏘는 광부들의 의식)’을 치르고 광부가 됐지만, 회사가 문을 닫으면 그의 광부 생활도 자동으로 마감된다. 장성광업소는 2000년 그의 동기 5명을 마지막으로 신입사원을 뽑지 않았다. 이제 지하 1,000m 갱도에서 실제 탄을 캐는 광부는 채 100명이 되지 않는다.
장성중앙시장 뒤 화신촌은 석탄산업이 전성기이던 시절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상가이자 유흥가였지만 지금은 빈집이 더 많다. 화신촌 뒤 산비탈 주택도 대부분 헐리거나 폐허로 변했다. 탄광도시의 마지막 자존심 장성마저 불 꺼진 유령도시가 되게 생겼다. 진형씨는 2년 전 우선 마을을 밝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뜻이 맞는 주민들과 ‘화신촌 사람들’이라는 모임을 꾸리고 사무국장을 맡았다.
해가 떨어지기 무섭게 어둠이 내려앉는 산자락에 눈사람과 클로버 모양 조명을 설치하고, 언덕으로 오르는 계단과 나뭇가지에 알전구를 달았다. 읍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에는 꼬마광부 조형물을 세우고, 지역 화가의 도움을 받아 골목에는 탄광촌의 과거와 현재 모습을 담은 그림을 걸었다.
그러나 아직은 관광지로 자랑할 수준이 못 된다. 진형씨는 10년은 내다보고 있다고 말했다. “기계를 동원해서 부수고 새로 지으면 1년도 안 걸리겠지만, 그러면 마을이 없어지잖아요.” 우선은 화신촌의 낡은 건물을 최대한 살려 공연과 전시를 할 수 있는 문화 공간으로 만들 생각이다. 그리고 광부의 후손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대대로 살아갈 터전을 닦는 게 ‘화신촌 사람들’의 최종 목표다. 태백 마지막 탄광촌의 10년 뒤 모습이 기대된다.
바라만 봐도 좋은 자작나무숲 셋
태백의 자작나무숲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시내에서 삼척 하장면으로 이어지는 35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권춘섭집앞’ 정류소가 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사람 이름이 들어간 버스정류소다. 주변에 권춘섭씨 집 외에는 마땅한 건물이 없기 때문이다.
자작나무숲은 권씨 집 뒤에 있다. 도로에서 작은 개울 위에 설치한 아치형 다리를 건너면 양지바른 산자락에 제법 넓은 밭과 권춘섭씨 집이 보이고, 지붕 뒤로 자작나무숲이 동화처럼 펼쳐진다. 수령은 지지리골 자작나무와 비슷하지만 더 굵고 수형도 곧다. 권씨 집에서 산등성이까지 산책로가 나 있지만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 흔적이 희미해지고 있다. 개인 집 마당을 통과하는 것도 부담이어서, 도로변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풍력발전소와 고랭지 배추밭으로 유명한 매봉산 ‘바람의언덕’ 맞은편에도 대규모 자작나무숲이 있다. ‘매봉산산악관광지’를 조성 중인 곳으로, 산책로를 겸하는 임도 좌우로 자작나무숲이 새하얀 자태를 뽐낸다. 해발 1,000m 고지여서 순백의 나뭇가지와 파란 하늘이 대조를 이룬다. 맞은편 산자락에는 눈 덮인 배추밭 위에 풍력발전 바람개비가 돌고 있다. 매봉산산악관광지에는 캠핑장과 숲속의집, 전망대와 숲길 등을 조성 중이다. 산책로는 현재도 걸을 수 있지만, 나머지 시설은 올해 말까지 준공할 예정이다.
고갯마루에 떨어진 빗방울이 한강, 낙동강, 삼척 오십천으로 갈라진다는 삼수령 아래 구와우마을에도 자작나무숲이 있다. 아직까지 산책로가 없어 도로변 ‘초막고갈두’ 식당 주차장에 차를 대고 바라만 보는 숲이다. 아홉 마리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이라는 구와우마을은 한여름 해바라기로 유명한 곳이다. 마을에 2개뿐인 ‘초막고갈두’와 ‘구와우순두부’ 식당이 모두 태백에서 맛집으로 알려져 관광객이 드문 겨울에도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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