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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들이 일본 성노예로 끌려간 적도 외딴섬에 ‘사랑해요 태극기’ 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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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들이 일본 성노예로 끌려간 적도 외딴섬에 ‘사랑해요 태극기’ 식당

입력
2022.02.06 15:40
수정
2022.02.06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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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정치범 수용됐던 인니 부루섬
닭국수 파는 작은 식당 벽에 그려진 태극기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의 '명동 가게' 주인 페준(오른쪽), 티나씨 부부가 직접 그린 태극기 벽화 앞에 앉았다. 부루=고찬유 특파원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의 '명동 가게' 주인 페준(오른쪽), 티나씨 부부가 직접 그린 태극기 벽화 앞에 앉았다. 부루=고찬유 특파원

탁자라고는 두 개밖에 없는 작은 식당에 유독 눈에 띄는 실내 벽화가 있다. '사랑해요' 글자 밑에 그려진 태극기다. 태극 문양과 건곤감리가 정확하게 선명했다. 식당 간판도 한글로 '명동 가게'라고 새겼다.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 동북쪽 직선거리로 2,236㎞ 떨어진 적도의 외딴 섬 부루(buru)에서 태극기와 한글을 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말루쿠주(州)에 속한 제주도 6.8배 남짓(1만2,656㎢) 넓이의 부루는 자카르타에서 말루쿠 주도인 암본까지 새벽 비행기를 타고 4시간, 다시 배로 8시간을 가야 닿을 수 있는 오지다. 몇 년 전 암본을 오가는 공항이 생기면서 그나마 물리적 거리가 줄었다.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 위치. 그래픽=강준구 기자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 위치. 그래픽=강준구 기자

부루는 비극의 섬이었다. 2차 세계대전 때 섬을 점령한 일본군은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끌고 온 소녀들을 성 노예(위안부)로 착취한 뒤 패망과 함께 버려두고 달아났다. 수하르토 군부 독재 시절인 1970년대에는 공산당이라고 낙인찍힌 정치범 1만2,000명이 유배돼 10년 넘게 강제 노역을 당했다.

더구나 2020년 기준 인구가 21만 명인 부루에 상주하는 한국인은 단 한 명뿐이다. 11년째 부루에 살고 있는 이현신(55)씨는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한글 간판을 보고 들어간 식당 안에서 태극기를 발견하고 가슴이 뜨거워졌다"고 말했다. 4일 태극기를 마주한 기자 역시 그랬다.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의 '명동 가게' 주인 페준(오른쪽), 티나씨 부부가 가게 앞에 섰다. 부루=고찬유 특파원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의 '명동 가게' 주인 페준(오른쪽), 티나씨 부부가 가게 앞에 섰다. 부루=고찬유 특파원

식당 주인 페준(34), 티나(25)씨 부부가 말했다. "자카르타에서 한국으로 인력을 송출하는 업체에서 일했어요. 그때 만난 한국인들이 친절했고 일도 보람이 됐죠. 저도 한국에 가고 싶었는데 뜻을 이루지 못했어요. 2016년 친구 권유로 부루에 온 뒤 이듬해 말 식당을 열었어요. 한국에 있는 친구가 '명동 가게'라는 상호를 한글로 적어 보내줬어요.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손님들의 볼거리를 고민하다가 인터넷을 보고 직접 태극기를 그렸습니다."

자세히 보면 태극기가 어딘가 조금 낯설다. 아래 절반만 흰색 바탕이고 위쪽은 적색 바탕이다. 인도네시아 국기 메라푸티(merah putih) 위에 태극기를 그린 것이다. 페준씨는 "인도네시아인으로서 한국을 사랑한다는 뜻을 담아 두 나라 국기를 하나로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또박또박 "사랑해요"라고 말했다.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 도로변에 있는 '명동 가게' 내부의 태극기 벽화. 인도네시아 국기 위에 태극기를 그렸다. 부루=고찬유 특파원

인도네시아 말루쿠주 부루섬 도로변에 있는 '명동 가게' 내부의 태극기 벽화. 인도네시아 국기 위에 태극기를 그렸다. 부루=고찬유 특파원

얘기를 듣다 보니 부부는 '명동 가게'의 뜻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페준씨는 "'사람들이 엄청 많이 모이는 장소'라는 친구의 뜻풀이를 곧이 믿었을 뿐 서울의 지명인 줄은 몰랐다"고 웃었다. 명동 가게는 인도네시아 닭국수인 미아얌(mi ayam) 등을 판다.

부부는 "손님들이 '한국에 온 기분으로 식사를 했다'고 답례하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태극기 사진을 올리기도 한다"고 전했다. 식당 평상에 앉은 히잡 교복 차림의 여학생들이 인터뷰를 마치고 떠나는 기자에게 "감사합니다" 수줍게 한국어로 인사했다. "감사합니다"라고 답하자 "까르르" 웃는 소리가 넘실댔다.

부루(말루쿠)= 고찬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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