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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 안 해본 남자들이 '설거지론'에 왜 열광하나

입력
2022.02.05 04:4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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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케케묵은 성별 구분의 가상세계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과학을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비평 전문가 이연숙 작가는 영화, 미술, 만화 등이 여성을 어떻게 그리는지를 통해 성별화된 감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설거지론'에서 설거지는 젊은 시절 성적으로 문란했던 여성이 열심히 노력해 좋은 직장에 다니는 순진한 남성과 결혼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속어다. 연합뉴스 유튜브 캡처

'설거지론'에서 설거지는 젊은 시절 성적으로 문란했던 여성이 열심히 노력해 좋은 직장에 다니는 순진한 남성과 결혼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속어다. 연합뉴스 유튜브 캡처


얼마 전 남초(男超) 커뮤니티를 달군 논란 중 하나는 바로 '설거지론'이다. 설거지론은 성실하고 순진한 남성과 성 경험이 풍부한 여성의 경제적 결합을 설거지에 비유한다. 설거지론 시나리오에서 남자는 남들이 한창 성적 모험을 즐길 시기에 안정적인 직장과 수입을 위해 모든 즐거움을 뒤로 미룬다. 그러다 적령기가 오면 연애 경험은 전무한 채로 자신의 경제적 능력에 맞춘 여자와 결혼하게 된다.

문제는 이 여자가 남자와는 달리 결혼 전 다수의 남자들과 쾌락적 관계를 가졌다는 것이다. 남자와의 결혼이라는 설거지를 통해 여자는 이런 과거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경제적·사회적 지위·관계에 진입할 수 있게 된다. 잃는 것 하나 없이 결혼으로 '손을 씻을' 수 있게 된 여자는 심지어 결혼 후에도 권리만 행사할 뿐 의무는 지려 하지 않는다.

페미니즘 반박 논리가 된 설거지론

지난해 말 커뮤니티 인기 게시글로 등록돼 있던 '설거지', '퐁퐁단' 등의 신조어를 다룬 글. 축구·스포츠 커뮤니티 게시판 캡처

지난해 말 커뮤니티 인기 게시글로 등록돼 있던 '설거지', '퐁퐁단' 등의 신조어를 다룬 글. 축구·스포츠 커뮤니티 게시판 캡처


이러한 시나리오 속에서 페미니스트들이 그토록 부르짖는 '가부장제 철폐'와 같은 구호는 오히려 여성들 자신의 분열과 모순을 폭로하는 증거일 뿐이다. 만약 여성들이 전통적 가부장의 '유해한(toxic)' 남성성을 제거하기를 원한다면 그들로부터 얻는 이익도 거부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아직도 여성들은 남성들이 '남자답게' 돈이나 벌어올 것을 요구하는가? 일터에서 돌아와 지친 남편에게 제대로 된 성적 봉사를 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으면서 말이다…

설거지론자에게 남성과 여성의 결혼이란 더 이상 사랑하는 두 사람의 낭만적 합일이 아니다. 결혼이란 남성의 경제력과 여성의 순결, 사랑, 헌신, 복종과 같은 정신적 가치를 서로 교환하는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거래 관계의 제도적 승인일 따름이다.

설거지론이 제기하는 가장 큰 문제는 이제 결혼이라는 거래가 남성에게 있어 더 이상 수지 맞는 장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불공정거래다. 믿음도 사랑도 없는 결혼을 통해 남성은 기껏해야 'ATM(월급 갖다 주는 사람을 낮게 이르는 말)'이나 '퐁퐁남(설거지론에서 기혼자를 이르는 말)'으로 전락할 뿐이다.

만약 지금 설거지론이 주는 교훈을 깨닫는데 실패한다면, 남성들은 삶에서의 주도권을 영구히 빼앗긴 채 쥐꼬리만 한 용돈에 만족하며 와이프의 눈치를 보며 살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페미니스트들의 불만과는 다르게, 사실 결혼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사기이자 착취가 아닌가?

'설거지론'이 남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자, 관련 기사들도 쏟아져 나왔다. 구글 캡처

'설거지론'이 남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자, 관련 기사들도 쏟아져 나왔다. 구글 캡처


설거지의 두 종류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설거지론 세계관은 남초 커뮤니티의 독창적인 발상이 아니다. 가부장제를 여성 억압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파악하는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오랫동안 "결혼은 합법적 매춘"이라 정의하며 결혼이 여성 거래의 한 형태임을 주장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설거지론은 설거지하는 사람의 성별에 따라 남성과 여성, 각자의 진영에서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요컨대 대다수의 페미니스트들에게 설거지론은 말 그대로 현실의 설거지를 의미할 것이다. 이때의 설거지론은 결혼을 한 이상, 제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여자라 해도 남자보다 더 자주 설거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가슴 아픈 '팩트'를 조목조목 나열하지는 않겠다. 알아서 통계를 찾아 보길 바란다.) 따라서 여성들에게 있어서도 설거지론은 결혼이 불공정 거래인 이유를 설명해주는 예시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남초 커뮤니티의 설거지론자에게 설거지란 그저 비유다. 자기네가 실제로 설거지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무튼 '문란한'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설거지하는 상황과 대충 비슷하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상상된 시나리오 속에서 남초 커뮤니티 내에서 때로 제기되는 반례나 '경험자'의 조언, 지적은 아직 각성하지 못한 '퐁퐁남'의 자기 합리화 정도로 치부된다. 아무리 맞벌이의 상황이나 결혼 당사자 두 사람 사이의 인간적인 소통 등의 현실적인 변수를 강조해봤자 설거지론자에게는 별 타격이 없는 셈이다.

원인은 내재된 불안과 분노다

왜일까? 비유로서든 현실로서든 설거지 같은 남 좋은 일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은 남성들에게 있어, 설거지론은 시나리오가 아니라 현실로서 고정되어야 할 당위가 있기 때문이다. 설거지론은 현실이 되어야만 한다. 그게 아니라면 불안정 노동 계급으로서 '우리'의 일부인 그들이 안정적 일자리에 대해 갖는 불안, '도태남(연애 시장에서 선택받지 못하는 남성)'으로서 품는 박탈감, 남성 기득권에 정당한 몫을 요구하는 여성들에 대한 분노를 어디에 투사할 수 있단 말인가?

이처럼 설거지론은 자기 안의 불안을 외부의 타자에게 투사하는 전형적인 편집증의 논리를 통해 지탱된다. 편집증의 관점에서 원인과 결과는 나의 바깥이 아니라 내 안의 독립적 의미망으로부터 구성되는 것이다. 본디 현실을 해석하고 변화시키기 위한 틀로서 '-이즘(ism)'이 언제나 현실로부터 따라 나온다는 점을 고려할 때, 설거지론은 차라리 심증의 이론화이며, 결국 현실의 발명에 가까운 셈이다. 설거지론자는 해보지도 않은 상상적 설거지를 통해 '성실하고 순진한 남성'의 결백한 자리에 이입한다. 이로써 지금 이 시간에도 열심히 설거지 중인 95%의 기혼자 여성들의 현실 위에 설거지론이라는 비유가 덮어씌워진다.

물론 두 종류의 설거지 모두 각자의 세계 속에서 양립 가능하다. 다시 말해 설거지론자의 현실에서는 설거지하는 남성들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95%의 기혼자 여성과 설거지론자의 현실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설거지론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은 잘못 알고 있어. 결혼 후에 설거지를 많이 하는 건 여자가 아니야. 결혼이란 사실 남자의 설거지거든…" 이것이 설거지에 대한, 참으로 통달하기 어려웠던 소박한 진실이다.

온라인에서 공유된 설거지론. 커뮤니티 게시글 캡처

온라인에서 공유된 설거지론. 커뮤니티 게시글 캡처


설거지론에 스며 있는 성별 각본

설거지론자들의 편집증적 시나리오는 '매노스피어(Manosphere)'라 불리는 해외 남초 커뮤니티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발견된다. 그것도 보다 정교한 판본으로 말이다. 매노스피어란 주로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남성들이 운영하는 웹사이트와 그러한 웹사이트에서 개진되는 의견들을 통칭하는 단어다. 기계적 여성혐오만 재생산하는게 아니라 나름의 '남성학'과 '남성운동'을 펼치는 클러스터를 일컫는다고 보면 될까.

매노스피어의 영향력 있는 인물들은 종교 지도자와 비슷하다. 설거지론처럼, 이들은 자신의 일족인 남성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시나리오를 발명한다. 이들에 의하면 남성들이란 평생 여성에게 착취당해야만 하는 비극적 운명에 처해 있다. 그럼에도 지도자인 자신들을 잘 따른다면 최소한 다른 남성들에 비해 '각성'된, 즉 '깨어 있는' 삶을 누리지 않겠냐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빨간약(red pill)'이 등장하는 장면. 이후 빨간약은 진실을 각성하게 하는 경험을 은유하는 상징이 됐다. 구글·다음영화 캡처

영화 '매트릭스'에서 '빨간약(red pill)'이 등장하는 장면. 이후 빨간약은 진실을 각성하게 하는 경험을 은유하는 상징이 됐다. 구글·다음영화 캡처


매노스피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핵심 개념 중 하나가 바로 '레드필(빨간약)'이다. 레드필 이론은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이데올로기에서부터 '깨어나', 이성 간 생태계 내에서 자신의 '계급'을 자각할 것을 요구한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빨간약을 먹고 비로소 가상에서 깨어나 메시아로서의 자기 역할을 깨닫는 것처럼 말이다.

매노스피어에서 유명한 필자 중 롤로 토마시는 자신의 저서 '합리적 남자'(임현진 역, 아니마, 2017)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남녀관계가 여성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매트릭스 안에서 살고 있다. (중략) 서구 문화권의 남자들은 남녀관계가 여성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구도를 당연하게 여긴다. 결혼과 동시에 별 생각 없이 아내의 프레임으로 완전하게 들어가 버린다. 그래서 여자의 프레임을 유일한 프레임으로 받아들이고 평생 여자를 상전으로 모시고 살아간다." 평생 일만 한 순진한 남편이 교활한 아내에게 잡혀 산다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케케묵은 성차별적 주장과 대단히 유사하지 않은가?

결국 설거지론이나 레드필이나, '남자는 원래 이래'와 '여자는 원래 이래'라는 철 지난 진화심리학적 관점을 마치 처음 발견한 이론인 양 포장지만 바꿔 내놓은 결과물일 뿐이다. 이들의 편집증적 시나리오에서 주인공이자 화자인 자기 자신을 제외한 누구도 남성과 여성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라는 '프레임'을 벗어날 수 없다. 이들이 보기에 대부분의 문제는 지나치게 문명화된 우리가 이 본성을 무시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나 왜 겪어보지도 않은 과거의 진짜 남성성과 진짜 여성성이라는 허구로 회귀해야 하는가? 설거지론은 누군가를 깨우는 인식의 해방구가 아니라, 오히려 살 만한 삶의 형태를 제한하고 위계 짓는 숨 막히는 성별 각본,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이 각본이 주장하는 원본성에 문제 제기하는 공동 전선을 위해, 우리 모두 가짜고 조금씩 미달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관점이 필요하다.


이연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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