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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생 위문편지, 어린 여성에게 허용된 글쓰기란?

입력
2022.01.29 04:4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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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전쟁에 이용되는 젠더분업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과학을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비평 전문가 이연숙 작가는 영화, 미술, 만화 등이 여성을 어떻게 그리는지를 통해 성별화된 감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지난 11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와 논란으로 번졌던 위문편지. 커뮤니티 캡처

지난 11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와 논란으로 번졌던 위문편지. 커뮤니티 캡처


지난 11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서울의 어느 여자고등학생이 국군 장병에게 보낸 위문편지가 공개됐다. 편지에는 "인생에 시련이 많을 건데 이 정도는 이겨줘야 사나이가 아닐까요", "눈 오면 열심히 치우세요" 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해당 학교 학생들은 군인을 조롱한다는 비난을 받고 심각한 수준의 디지털 성폭력 피해를 겪었다.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편지를 작성한 학생의 신상 정보가 유출되었다. SNS 등 인터넷에 성희롱 댓글과 나체 합성 이미지 등이 떠돌았다. 현재 서울시교육청은 서울 종로경찰서에 수사를 의뢰한 상태다.

'아니, 요즘도 위문편지를 쓴다고?' 이 사건을 접하고, 많은 분들이 의아해했다. 위문편지 쓰기는 과거 군사독재정부 시절 반공교육의 일환으로 국민학생에게 강제되었으나 '87 항쟁' 이후 이른바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점차 사라진 제도다. 그런데 아직도 학생들에게 위문편지를 쓰도록 시키고 있다니? 그것도 여자고등학교에서만? 학교 측에서도 '위문편지 작성 시 본명, 주소를 밝히지 말라'는 가이드라인 교육까지 할 정도로 이미 성폭력 피해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는데 말이다.

의아한 점이 더 있다. 내가 여고를 다니던 20세기에는 복장, 두발 검사와 함께 '소지품 검사'도 있었다. 불시로 교사들이 학생들의 가방을 뒤졌다. 검사의 목적은 학생 신분에 맞지 않은 물건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화장품이나 담배, 라이터, 연애 편지 같은 물건을 갖고 있다가 들키면 큰 벌을 받았다. 여기에서 '연애 편지'에 주목. 어린 여성은 남성과 편지를 주고받는 것을 금지당했으며 들키면 징죄당했다는 사실에 주목.

여성에게 허락된 편지가 따로 있다

과거 여성들 대부분은 글을 읽고 쓰지 못했다. 여성에게는 글공부할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종대왕께서 어리석은 백성을 불쌍히 여겨 친히 훈민정음을 만들어 글을 쉽게 배워 쓰라고 신신당부하셨건만, 성차별은 왕보다 더 힘이 셌다.

1900년대에 태어난 내 할머니는 지역에서 '강진사댁'하면 다 알아줄 정도로 행세하는 집안 따님이셨지만 한자는커녕 한글도 익히지 못했다. 부친 강 진사는 "딸에게 글자를 가르치면 연애편지를 쓰거나, 시집간 후에 친정에 시집살이 하소연하는 편지나 써 보내니까 곤란하다. 가르쳐서는 안 된다"라는 신념을 갖고 실천했다. 집안 여성을 쉽게 지배하려는 핑계다. 딸에게 젓가락도 주지 않던 양반이셨으니까.

강 진사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현재 할머님 어머님 세대 여성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교육 기회를 박탈하는 이유로 '편지질 할까봐'라는 말을 들었던 분들이 상당히 많다. 이상하지 않은가. 이렇게나 남자에게 편지 보낼까봐 딸에게 한글도 안 가르치던 나라에서 군인에게 위문편지 쓰기는 장려했다는 것이. 그것도 21세기가 1/5이나 지난 2022년까지.

궁금하다. 성차별 사회가 여성에게 허락하는 편지 쓰기란 무엇인가? 연애 편지는 안 되고 위문편지는 되는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쓰거나 나의 힘든 상황을 알려 구조를 요청하면 안 되고, 군인 남성을 위안하는 목적으로 쓰면 괜찮은 것인가? 남고는 군부대와 '형제'결연을 맺어 봉사 활동으로 위문편지를 쓰고 댄스 공연을 하러 가지 않는데, 왜 여고만 '자매'결연을 맺어 그런 활동을 하는가? 국군장병에게 고마워하는 것이야 모든 시민에게 보편적으로 요구되는 바다. 그런데 왜 유달리 여성 그것도 '어린 여성'에게만 위문의 의무가 강제되는가? 어떤 배경이 있을까?

전쟁 나간 남성 위안에 동원된 여성들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포스터 속에 주인공이 '다스키'를 걸고 일하고 있다. 다음영화 캡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포스터 속에 주인공이 '다스키'를 걸고 일하고 있다. 다음영화 캡처


1937년, 일제는 중일전쟁을 일으킨다. 전쟁의 목적은 노동력과 원료를 제공하고 상품 시장이 될 식민지 확보였다. 전선이 확장되면서 물자와 인력이 모자라게 되자 일제는 전 국민에게 전쟁 협력을 강제한다. 여성 동원도 강요되었다. 일본 여성들은 여성 단체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서 여성의 권리 신장이 아니라 전시 국가의 국민으로서 어머니로서 주부로서 노동자로서 네 가지 역할을 완벽히 하자는 운동에 참여해야 했다.

당시 여성을 동원하면서 내건 슬로건 중 하나는 "군인은 생명을 걸고, 우리들은 다스키(襷·たすき·일본 전통 복장을 입고 일할 때 옷소매를 고정시키는 끈)를 걸고"였다. 그러나 전쟁터로 떠난 남성들 대신에 집밖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여성의 지위가 높아진 것은 아니다. 성별 분업은 여전했다. 여성들은 공장이나 광산 등 남성의 빈자리에서 노동하는 것 외에 출병 병사 전송 행사에 내몰렸다.

센닌바리(千人針)와 위문대(慰問袋)를 손바느질로 만드는 일도 해야 했다. 센닌바리는 전쟁에 나간 병사들이 살아 돌아오길 빌며 1,000명의 여자가 붉은 실로 무운장구(武運長久)라는 글씨를 한땀씩 놓아 만든 일종의 수예품 허리띠다. 병사가 몸에 지니면 총알도 비켜간다는 이유로 여성들에게 만들게 했다. 위문대는 끈으로 입구를 조이게 만든 주머니인데, 각종 위문품을 넣어 전선으로 보내는 용도로 썼다. 위문대 안에는 위문품과 함께 위문편지가 들어 있었다.

위문대. 국립민속박물관 블로그 캡처

위문대. 국립민속박물관 블로그 캡처


당시 위문편지를 쓰도록 동원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1937년에 발표된 '눈물의 위문대(淚の慰問袋)'라는 대중가요 가사를 보면 짐작이 간다. 가사 내용은 이렇다. '중국 하북 지방 전선에 있는 병사가 위문대를 끌러본다. 사랑스러운 어린아이의 편지를 읽고 앳된 단발머리 소녀 사진을 본다. 덕분에 병사는 밤에 총을 닦으며 전의를 다진다.' 그렇다. 성인 남성인 군인에게 위문편지를 써야 하는 대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아동과 병사보다 어린 여성이었다. 이상하다. 왜 군인은 아동과 여성의 위안을 받아야 할까?

일본 여성에게만이 아니다. 이 모든 일은 우리나라 여성들에게도 강제로 부과되었다. 1938년 4월 공포된 국가총동원법은 식민지 조선에도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국가 총동원이라는 것은 전시에 국방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국가의 전력을 가장 유용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인적 및 물적 지원을 통제, 운용하는 것을 말한다."(국가총동원법 제1조)

조선 여성들은 식민지 여성이었기에 일본 여성보다 조선 남성보다 더한 부담과 의무를 져야 했다. 그 결과 일본군 성노예로까지 강제 동원된다. 당시 조선의 학생들은 어땠을까? 1944년 10월에 공포된 '학도근로령'에 의해 학생들은 행군을 하고 군대식 체조를 하고 방공 훈련을 했다. 여기에 더해 여학생들은 위문대 만들기, 위문문 쓰기, 군수 공장에서 군복을 바느질하거나 군인들의 내복을 빠는 일에도 동원되었다.

일본 대중가요 '눈물의 위문대' 가사에는 소녀의 위문편지를 받는 병사의 얘기가 담겨 있다. 유튜브 캡처

일본 대중가요 '눈물의 위문대' 가사에는 소녀의 위문편지를 받는 병사의 얘기가 담겨 있다. 유튜브 캡처


징병의 대가가 여성 위안이라는 착각

이상의 역사적 사실은 파시즘 국가의 젠더 분업을 명백히 보여준다. 여성은 미래의 병사가 될 생명 생산과 남성 돌봄과 위안을 하고, 남성은 여성의 위안을 받고 전쟁에 전념한다. 그래서 위문편지는 군인 남성보다 어린 여성과 아동만이 쓴다. 그들의 위문편지를 받아야 자신이 여성과 아이를 지키는 진짜 남자라고 믿고 강제로 전쟁에 동원한 국가에 저항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여고생에게 위문편지 쓰기를 강제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일 뿐만 아니라 해롭다. 어린 여성에게 남성을 위안하는 존재가 되라고 가르치는 성차별 교육이기에 해롭다. 남성들에게도 해롭다. 민주 사회에 맞지 않은 파시즘 국가의 젠더 분업을 가르쳐서 '군대에 가는 존재'라는 이유로 '남성은 여성에게 평생 위안받아야 한다'는 사고를 주입하기 때문이다. 앞서 해당 학교의 교사들은 학생을 위하고 보호해야 할 교사로서가 아니라 군대에 다녀왔기에 여성의 위안을 마땅히 받아야 할 남성의 입장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기에 문제다.

우리 인류에게는 각 시대마다 각 세대마다 치러야 할 과거 청산의 과제가 늘 있기 마련이다. 지금 시급히 청산해야 할 것은 구시대적 성차별 교육이다. 더 이상 어린 여성들을 남성을 위안하는 존재로 가르치지 말라!

박신영 작가가 갓 제대한 조카와 주고받은 카톡 일부. 캡처 화면을 써야 되냐고 묻자 99년생 박 병장은 "물론 당근빠따입니다"라며 허락했다. 박 작가 제공

박신영 작가가 갓 제대한 조카와 주고받은 카톡 일부. 캡처 화면을 써야 되냐고 묻자 99년생 박 병장은 "물론 당근빠따입니다"라며 허락했다. 박 작가 제공


덧, 남성 군장병을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대부분 여성들은 군인을 혐오하지 않는다. 내 경우만 봐도 그렇다. 나는 얼마 전에 제대한 내 조카를 사랑한다. 원고료 모아 조카 용돈 주면 얼마나 행복하게요! 일부 남성들은 여성들, 특히 페미들이 군인을 무시해서 문제라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생각해 보라. 군대 갈 때 걱정하고 용돈 주시던 여러분의 어머니, 할머니, 이모, 고모 모두 여성이다. 다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남자형제보다 차별받고 교육 못 받은 한과 아버지나 남편의 폭력, 외도를 증언하고 계시니 페미니스트들이다. 그런데도 '군인에게 고마워하지 않는 괘씸한 페미 여성'으로 10대 20대 여성들을 지목하고 공격하는 이유는 뭘까? 그것이 바로 남성들이 군대 간 대가로 또래 여성들의 위안을 원한다는 증거가 아닐까.


박신영 작가

박신영 작가


박신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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