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미투(#MeToo)’의 상징으로 불리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이토 시오리(32)씨가 자신을 성폭행한 전 TBS 기자 야마구치 노리유키(55)를 상대로 1,100만 엔의 손해배상을 청구한 소송에서 또다시 승소했다. 이토는 25일 항소심 승소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동안 겪은 고통에도 “목소리를 낸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26일 마이니치신문 등에 따르면 전날 도쿄고등재판소(고법)에서 열린 항소심 결과, 재판부는 “동의 없이 성행위에 이르렀다”며 야마구치에게 배상을 명령했다. 배상액은 2019년 12월 1심 당시의 330만 엔에서 332만 엔으로 소폭 증액했다.
판결은 이토와 야마구치가 성관계를 가질 정도로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고, 이토가 사건 직후 친구나 경찰 등에 피해를 상담하고 신고했다는 사실에 근거해, 1심에 이어 “동의 없는 행위”였다는 이토의 주장을 “신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합의된 성행위”라는 야마구치의 주장은 “사실과 분명히 괴리돼 신용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이토가 자신의 저서나 기자회견 등에서 “데이트 강간약물을 사용한 것 같다”고 표현한 부분은 허위이고 자신의 명예가 훼손됐다고 주장한 야마구치의 주장도 일부 인정해, 이토에게 55만 엔의 배상을 명했다.
이토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그동안의 고통을 떠올리며 “(소송이) 내 인생에 끼친 영향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오늘도 만약 패소하면 일본에서 살 수 없게 된다는 두려움이 앞섰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목소리를 높인 것에 후회는 없다”며 “목소리를 높이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어딘가에 도착한다. 그게 내가 믿는 저널리즘의 희망”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자신의 행동과 이를 지지한 사람들, 기자들에 의해 성폭력 문제가 사회적 논의로 진전된 사실을 언급하며 “(법무성에서 진행하는) 형법 개정 검토에서도 성행위 동의 여부에 대한 논의가 되고 있다. 제게 일어난 일이 법으로 제대로 심판받는 세상이 올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이토는 언론인 지망생이던 2015년 4월 야마구치 TBS 기자에게 만취한 상태에서 의식이 없는 가운데 성폭행을 당했다. 사건 후 ‘준강간’ 혐의로 경찰에 신고했으나 검찰은 야마구치를 불기소하는 등 당시 일본 사회는 성폭력 피해자 인권에 둔감한 모습을 보였다. 아베 신조 당시 총리의 ‘친구’로 불릴 만큼 가해자가 유력 언론인이었다는 배경이 작용했다는 추측도 나왔다.
가해자의 형사처벌이 불가능해지자 이토는 민사 소송을 제기했다. 2018년 미국발 미투 운동이 세계로 확산됐고, 이듬해 일본에서도 성폭력에 항의하는 ‘플라워 시위’가 전국에서 열리는 등 여성 인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이토는 결국 2019년 12월 1심에서 승소했다. 사건이 일어난 지 4년 8개월 만에 거둔 승리였지만 이토는 그때까지 수많은 비방과 모욕에 시달렸다. 현재도 그를 향한 비방은 인터넷 등에서 계속돼 별도의 명예훼손 소송을 진행 중이기도 하다. 미국 시사주간 ‘타임’은 그를 2020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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