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 소설집 '장미의 이름은 장미'

뉴욕 맨해튼의 스카이라인. 게티이미지뱅크
일찍이 전혜린은 ‘먼 곳에의 그리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르는 얼굴과 마음과 언어 사이에서 혼자이고 싶은 마음! 텅 빈 위와 향수를 안고 돌로 포장된 음습한 길을 거닐고 싶은 욕망, 아무튼 낯익은 곳이 아닌 다른 곳, 모르는 곳에 존재하고 싶은 욕구가 항상 나에게는 있다.”
전혜린뿐일까. ‘모르는 얼굴과 마음과 언어’ 사이에서 비로소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기에 그토록 많은 작가들이 외국으로 훌훌 떠났을 것이다. ‘나’라는 존재의 완벽한 무력함을 실감하면서, 동시에 익숙한 언어 사이에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 것들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모종의 기대와 함께.
은희경의 신작 소설집 ‘장미의 이름은 장미’는 그렇게 작가가 뉴욕이라는 도시로 훌쩍 떠나 발견한 것들의 모음이다. ‘중국식 룰렛’ 이후 6년 만의 소설집으로 제29회 오영수문학상을 수상한 표제작 ‘장미의 이름은 장미’를 포함해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 ‘양과 시계가 없는 궁전’, ‘아가씨 유정도 하지’까지 뉴욕을 배경으로 한 총 네 편의 연작 소설이 실려 있다.
나와 타인 사이 미묘하게 뒤틀렸다 또다시 봉합되는 순간들을 포착해왔던 작가의 시선은 언어가 뭉툭해진 세계에서 더욱 예리하게 빛난다. “모두에게 열려 있는 듯하지만 문이 하도 많아 좀처럼 안쪽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도시” “처음에는 환대하는 듯하다가 이쪽에서 손을 내밀기 시작하면 정색을 하고 물러나는 낯선 얼굴의 연인” 같은 도시인 뉴욕은 은희경의 시선 아래 새롭게 태어난다.

장미의 이름은 장미
-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발행
- 256쪽
- 1만5,000원
전 세계에서 가장 복잡하고 무모한 도시로 떠나 부대끼기에, 소설의 주인공들은 얼핏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승아는 평소 “스스로를 현실주의자라고 생각하면서 조건에 순응”해왔다.(‘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 현주는 “자신의 판단을 믿지 못하는 채로 주어진 관성에 끌려”다녔다.(‘양과 시계가 없는 궁전’)
그런 그들이 다소 충동적으로 뉴욕으로 향한 것은 자신의 현실조건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 승아는 계약직 연장이 되지 않는 직장으로부터, 현주는 글이 써지지 않는 시간으로부터 도망친다. 수진 역시 마찬가지다. 이혼을 한 수진은 “자신의 소심함과 방어적인 수동성에 신물이” 난 나머지 뉴욕으로 어학연수를 가기로 결심한다.
“수진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뿐 아니라 자신에게서도 도망치고 싶었는지 모른다(…) 결코 나아질 리 없는데도 그럭저럭 머물게 되는 계약직 생활, 그리고 그런 사실들을 불현듯 깨닫게 만들었던 깨어지고 부서져서 결국 사라져버린 관계들. 수진은 이곳으로 떠나오며 그녀를 규정하는 나이와 삶의 이력에서 잠시나마 이탈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장미의 이름은 장미’)

은희경 소설가. ©전예슬
그러나 낯선 도시는 '도망치듯 떠나온' 이방인에게 결코 다정한 곁을 내어주지 않는다. “관광객은 열린 문 밖에서 선 채로 피상적인 환대를” 받을 뿐이며 “관광객도 계급이 나뉘며, 그 편견이 작동하면 이방인에게는 그마저도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내 깨닫는다. 게다가 낯선 도시의 유일한 피난처가 되어주리라 기대했던 가까운 이들은 오히려 더욱 멀게만 느껴진다. 승아의 소꿉친구인 민영은 승아의 뉴욕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현주의 연인인 로언은 현주의 짧은 영어를 타박하며 배려하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오히려 나와 가장 다르다 생각했던 이들로부터 우정은 새롭게 발견된다. 수진은 어학원에서 만난 무슬림의 세네갈 대학생 마마두와 짧지만 분명한 언어로 대화하며 해방감을 느낀다. 오십 대의 아들은 팔십 대의 어머니와 닷새 동안 뉴욕 여행을 하며 언제나 냉정하고 독립적으로만 보여졌던 어머니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다.(‘아가씨 유정도 하지’)
낯선 공간과 사람들, 제약된 언어 사이에서 오해는 필연적이다. 그러나 그 오해를 거치지 않고서는 서로를 이해하는 일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 “가까이 가면 너무 크니까” 강 건너 멀리에서 봐야만 비로소 제대로 보이는 맨해튼처럼, 멀리 뉴욕으로 떠난 뒤에야 어떤 이해는 비로소 발견된다. 그게 바로 ‘은희경식 뉴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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