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 없는 여가부 존폐 논쟁에
결혼이민자·경단녀·싱글대디 등
뒷전이 된 정책 대상자들
편집자주
대선 후 들어설 새 정부에 '여성가족부' 존폐가 걸렸다. 젠더 갈등 정쟁과 2030 표심 계산이 난무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들이 빠졌다. 정책 당사자인 소수자와 약자의 목소리, 그리고 대안이다.
베트남 출신 부티하오(32)씨가 결혼하면서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건 24세 때. 한국말이 서툰 그에게 가장 두려운 곳은 병원과 시장이었다. 알아볼 수 있는 건 아라비아 숫자뿐이건만 가격표가 없는 시장에서 장보기는 버거운 일이었다. 두통으로 병원에 가서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키며 "아파요"만 반복하다 나온 뒤론 아파도 병원 가는 걸 포기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어려운 일투성이였다. 임신하면서 병원을 가지 않을 수 없게 됐을 때, 친구가 없어 외로울 때, 아이가 또래보다 말이 늦을 때, 일자리가 필요할 때… 그때마다 부티하오씨와 같이 병원을 가주고 언어를 가르치며 취직 준비를 도와준 곳은 가족센터, 여성가족부 산하 다문화가족 지원 시설이다.
여가부 폐지되면 우린 어디로 가요?
그런 부티하오씨는 19일 "요즘 뉴스만 보면 마음이 심란하다"고 했다. "여기서 아기 언어 발달도 2년 동안 도와줬고, 친구도 생겼고, 취직도 했어요. 저한텐 두 번째 집이거든요. 여가부가 없어질 수도 있다고 하던데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해요?"
여가부 존폐론은 이번 대선 핵심 이슈다. 여성만을 위한 부처란 이미지가 강해 젠더 갈등 한복판에 서 있지만, 여가부 예산의 60%는 한부모, 다문화 등 가족돌봄에, 20%는 학교 밖 청소년 등 청소년 보호에 쓰인다. 젠더 관점에 매몰된 사이 잊힌 정책 당사자들도 있다는 얘기다. 이들에겐 구체적인 대안 없는 존폐 논쟁이 불안하기만 하다.
문강(20)씨는 고2 때 자퇴를 했다. 대학 진학을 원하는 문씨에게 취업에 특화된 특성화고는 맞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회와 단절되길 원한 건 아니었지만, 학교 울타리를 벗어나자 자연스레 선생님, 친구들과 멀어졌다. 대입을 준비하려면 입시 정보도 필요했고, 무엇보다 혼자 감당하기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소속감을 원했다.
"자퇴한 뒤에는 불안과 후회의 반복이었어요. 내일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니까 걱정도 많았고요. 실패하면 어떡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고민에 항상 지쳐 있었어요."
젠더 싸움에 '논외'가 된 약자로서의 삶
자신감을 잃고 무기력해지는 경험은 백현정(31)씨도 비슷했다. 2년 정도 마케팅 업무를 하다 아이를 가지면서 그만뒀고 육아와 가사를 책임져야 했다. 그렇게 경력이 단절된 기간이 4년이다. 백씨는 "경력이 다 사라지는 기분"이라며 "다시 일을 하고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하던 때"라고 기억했다.
문씨와 백씨 삶이 바뀌기 시작한 건 여가부가 운영 중인 학교 밖 청소년 지원센터와 경력단절 여성을 위한 새일센터를 다닌 뒤부터다. 삶에 대한 태도가 바뀌고 꿈도 생겼다.
문씨는 "'나를 환영해 주는 곳도 있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꼈다"며 "실패해도 괜찮다고 응원해 주고 맞춤형으로 공부와 입시 준비를 도와 준 지도자 선생님들 덕에 잘 버텼다"고 했다. 청소년학과에 진학해 22학번이 되는 문씨는 청소년 지원 분야에서 일하는 게 꿈이다. 4개월간 월~금 5시간씩 디지털 마케팅 교육 훈련을 받고 재취업에 성공한 백씨는 이제 5개월 차 직장인이다. 그는 "다시 일하니까 너무 좋다"며 "자신감을 얻은 게 삶의 큰 변화"라고 말했다.
출생신고 막힌 미혼부에 걸려온 전화
미혼부 김지환(45)씨는 어느 날 받은 전화 한 통을 기억하고 있다. 혼인 외 출생자 신고는 엄마가 해야 한다는 법조항에 막혀 16개월 만에 겨우 딸 출생신고를 한 그였다. 어린 아이 유모차에 태워 1인 시위를 하고, 네 차례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얻어낸 결과물이었다.
김씨는 "여가부에서 한부모 정책 담당하는 사무관이라면서 전화를 걸어와 관련 문제점을 꼬치꼬치 캐물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그때 여가부의 존재감을 느꼈다고 했다. "사실 미혼부의 출생신고, 양육문제, 아동 생존권 같은 문제를 개선하려면 보건복지부나 법무부가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거기는 꿈쩍하지 않고 여가부에서 관심을 가져줬어요." 김씨는 이후 미혼부 지원단체 '아빠의 품'을 만들어 싱글대디 지원 활동까지 벌이고 있다.
"우리 목소리도 들어주세요"
이들은 정책의 효과와 변화를 체감했다는 점에서 여가부 존폐론에 대해 "씁쓸하다"고 입을 모았다. 남녀를 갈라치는 목소리만 가득할 뿐, 정작 자기들처럼 어디에도 속하기 어려운 이들을 위한 대책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말이 없어서다. .
문강씨는 "여가부를 없애겠다는 당들의 아동 청소년 정책을 보면 대부분 공교육 내 친구들을 위한 것이라 전부 실현된다 해도 학교 밖 청소년한테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부처를 없애거나 개편한다면 학교 밖 청소년 문제는 어디서 어떻게 다룰지 함께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지환씨도 "지금 여가부도 맡은 정책에 비해 예산과 인력이 부족해 제대로 된 지원을 못 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런 상황에서 여가부 이상으로 일을 잘할 수 있는 구조를 어떻게 만들 것이냐에 대한 설명 없이 젠더 갈등을 이유로 그저 비난의 대상으로만 삼는 건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