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대전 한밭대장간 전만배 장인
산업화 이전, 자급자족이 주를 이루던 농어촌에서 대장간은 마을에 없어선 안 되는 필수시설이었다. 시골장터 등에서 주로 볼 수 있었던 대장간에는 마을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농기구나 각종 연장을 주로 만드는 대장장이들은 무뎌진 연장을 봐주기도 했다. 오랜 숙련을 통해 담금질로 쇠의 강도나 성질을 조절할 줄 아는 대장장이들은 각 지역마다 토질과 기후 등에 적합한 농기구와 연장을 제작해, 농사에 큰 도움이 됐다. 고된 일이지만, 수입도 짭짤해 인기 있는 직업으로 통했다. 대량 생산시스템이 도입되면서 대장간은 하나둘 사라졌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호미 한 개를 만드는 데 한 시간은 족히 걸리지만, 공장에서 기계로는 같은 시간에 수십 개씩 찍어내니 가격도, 생산량도 경쟁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증조부 때부터 4대째 화덕의 불씨를 지키며, 사라져 가는 대장간의 명맥을 잇고 있는 '칼 전문' 대장간이 대전에 있다. 한밭대장간이 그 주인공이다.
100년 넘는 세월 4대째 이어진 대장장이
한밭대장간은 지금의 주인 전만배(65)씨의 할아버지가 110여 년 전 충남 부여 세도면에서 문을 열었다. 이후 강원도와 경기도, 서울, 충남 논산 등으로 옮겨다니다 1996년 대전에 터를 잡았다. 지역을 옮길 때마다, 철제 제품을 꼼꼼하게 만드는 것으로 입소문이 자자했던, 할아버지 뒤를 이어 전씨 아버지가 쇠망치를 잡았다. 어릴 적부터 대장간을 놀이터 삼았던 전씨도 아버지를 따라 자연스럽게 14살 때부터 대장장이가 됐고, 벌써 50년 넘게 쇠를 달궈 연장을 만들고 있다. 동물 사육사를 꿈꾸던 전씨 아들 전종렬(33)씨는 전씨 밑에서 일을 배우던 사람들이 버티지 못하고 떠나자, '이대로 가면 아버지의 유산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업을 잇기로 했다. 4대째 대장장이가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다. 지난 10일 오후 찾은 대전 유성의 한밭대장간에는 손님 10여 명이 숨을 죽인 채 전 장인이 칼을 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숫돌에서 불꽃이 튀었지만, 날카로운 시선으로 칼을 갈던 전씨는 대뜸 "칼이 삐뚤어졌네. 이런 칼을 어떻게 쓰냐"고 했다. 그러더니 화덕 옆에 있던 산소용접기로 칼을 달궈 열 처리를 한 뒤, 날을 망치로 두들겨 똑바로 편 뒤 숫돌에 다시 갈았다. 지켜보던 손님은 "역시 대단하네요. 여기로 오길 역시 잘했다"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날 대장간에 모여있던 손님들은 대부분 식당 주방장이자, 한밭대장간 단골이다.
유성 소재 일식집 주방장 홍승완(36)씨는 "지인에게 소개받아 이용하고 있는데 너무 마음에 들어 6개월에 한 번씩 오고 있다"며 "오늘은 쓰고 있는 칼을 갈고, 생선회용, 야채썰기용, 생선해체용, 그리고 우리 가게 막내 요리사 칼까지 10개 정도를 구입했다"고 말했다. 홍씨는 "여기선 내가 칼을 쓰는 습관까지 고려해 갈아준다"고 한밭대장간만의 장점을 귀띔했다.
대장간 쇠락 속 '칼 전문 대장장이'가 되다
대장장이를 평생 천직으로 생각한 전씨는 농기구를 비롯한 철제 생활용품 제작이 기계화되면서 대장간을 찾는 사람들이 줄자 혼자 잘할 수 있는 걸 찾았다. 고민 끝에 선택한 게 칼이다. 오래 쓰는 칼을 만들고 싶었던 그는 우리나라는 물론 외국의 좋은 칼도 써보는 등 17년간 연구에 매달렸다. 이런 노력 끝에 그는 일본산 VG-10 스테인레스강에 자신만의 제작 노하우를 더해 30여 종의 칼을 완성했다. 그렇게 완성된 칼을 써본 손님들은 기대 이상의 극찬을 했다. 전씨는 "요리사들이 저한테 구입한 칼을 몇 달 쓰다가 들고 왔는데 칼이 그대로여서 뭐가 불편해서 안 쓴 거냐고 물어봤더니 계속 썼다고 하더라"며 "내 예상을 뛰어넘는 칼이 나온 걸 나도 못알아봤다"고 말했다. 전씨는 그러면서 "칼 하나를 만들기 위해선 최소 16번 이상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며 "좋은 칼은 녹이 슬지 않고, 잘 썰어져야 하고, 오랫동안 써야 한다. 거기에 미적 감각까지 있으면 금상첨화"라고 덧붙였다.
'칼 전문' 대장장이로서 소문난 전씨를 찾기 위해 전국은 물론 해외에서까지 사람들이 찾는다. 전씨는 "어렸을 때 벨기에에 입양돼, 가장 인정받는 요리사가 된 한국계 요리사가 우리나라에서 열린 국제요리대회에 왔다가 가장 좋은 칼을 쓰고 싶다면서 내가 만든 칼을 사가지고 갔다"고 말했다. 러시아 모스크바의 한 유명 호텔 주방장이 된 한국인 요리사도 호텔 사장에게 '전씨가 만든 칼을 꼭 써야 한다'며 사달라고 해 만들어줬다고도 했다.
전씨는 독일의 한 사업가가 함께 사업을 하자며 백지수표를 꺼낸 일화도 소개했다. 2008년 전씨 대장간에서 칼을 갈고 돌아간 독일인이 1년 만에 함께 사업을 하자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칼 제작에 매진해온 인생에 대한 보상을 벽안의 이방인으로부터 인정받는 것 같아 뿌듯했다. 하지만 전씨는 "자신의 기술을 독일, 나중엔 다른 나라에까지 체인사업에 활용할 게 뻔해 대한민국 대장장이로서 받아들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백지수표에 18억 원이라는 거금을 적었는데, 잠시 뒤 독일인 사업가로부터 '주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순간 당황한 전씨가 집과 차 등 추가로 지원해 달라고 요구하자, 그제서야 독일인 사업가는 자신의 사업 욕심이 들킨 것을 눈치채고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고 말한 뒤, 독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힘들고 위험하지만 자부심으로 가업 이어
아들이 대를 이어 대장장이가 된다고 했을 때 전씨는 "고된 삶이 될 게 뻔해 말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이왕 시작했으니 내가 아는 모든 걸 전수해 주고 있다"고 말했다. 전씨 아들은 주로 대전 한밭대장간에서 아버지로부터 일을 배웠다. 10년 넘게 배워도 다 익히기 어려운 일인데, 아들은 어릴 적부터 대장간을 드나들며 어깨너머로 봐서 그런지 남들보다 기술 습득 속도가 빨랐다. 2년 정도 가르친 뒤, 칼 연마를 전문으로 하는 노량진수산시장에 있는 서울지점을 아들에게 맡겼다. 이후에도 서울과 대전을 오가며 아들과 10년을 함께했고, 이젠 아들이 서울지점 대표를 맡아 운영하고 있다.
아들 전씨 역시 이곳에서 하루 평균 100여 자루의 칼을 연마한다. 시장 상인은 물론, 각 지역의 횟집과 정육점, 일식집과 조리 전공 학생 등이 많이 찾는다. 처음 찾으면 칼 한자루에 1만1,000원 이상을, 두 번째부터는 3,300원을 받는다. 이는 서울과 대전 모두 마찬가지다. 칼 연마에 있어선 전국 최고라는 자부심이 반영된 가격이다.
전씨는 "아들이 손을 심하게 다친 적도 몇 번 있었는데, 포기하지 않고 뚝심있게 하는 걸 보면 마음이 아프면서도 뿌듯했다"며 "칭찬을 잘 하지 않는 성격이라 말은 안했지만 아들은 이제 이미 칼 연마에 있어선 나를 넘어선 것 같다"고 말했다. 전씨 아들은 "군 제대를 앞두고 인생 진로를 고민하던 중 고단하지만 한 가지에 정진하는 아버지를 보며 가업을 이어야겠다는 생각에 대장장이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전씨는 대전에서 얼마 전 들인 제자 황덕환(31)씨와 함께 쇠를 달궈 칼을 만들고 있다. 영주대장간에서 일했던 황씨는 지난해 1월부터 이곳에서 대장장이 수업을 받고 있다. 황씨는 "처음에 찾아뵙고 일을 배우고 싶다고 했는데 받아주시질 않았다"며 "그래도 계속 찾아와 배우고 싶다고 하니 스승님께서 앞으로 2년을 줄 테니 일단 열심해 해보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전씨는 "제자 하나 제대로 키우려면 적어도 10년 이상은 같이 일해야 한다"며 "아들과 제자가 세계를 무대로 우리 기술을 자랑하고, 그에 맞는 대우를 받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씨의 바람은 많이 남지 않은 전국의 대장장이들이 하나로 뭉쳐, 대장간 보존 등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는 "현재 전국에 남아 있는 대장간은 70개 정도에 불과한데, 필요성은 공감하면서도 선뜻 함께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면서 "2018년 말에 대장간총연합회를 만들었는데 참여한 사람은 8명뿐이었다"고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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