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자 김영선 신간 '존버씨의 죽음'
"이렇게 극단적 경우가 나와야 주목하지만 실제 그 직전까지 가고 있는 수많은 월급쟁이들이 있다."
과로에 시달린 한 자동차 디자이너의 죽음이 1년여 만에 재조명된 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온 한마디의 무게가 묵직하다. '과로 사회'(2013), '누가 김부장을 죽였나'(2018) 등을 통해 장시간 노동의 현실을 고발해 온 사회학자 김영선의 신간 '존버씨의 죽음' 집필 동기와 맞닿아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는 서문에서 견고한 과로+성과체제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과로죽음을 다각도로 드러내는 작업의 하나로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과로죽음은 자주 취약한 개인의 문제로 귀결되지만 여러 사건에서 공통적으로 구조적 문제가 덧대어 있다고도 했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과로 문제를 추적해 온 저자는 이번 책에서 과로죽음을 본격적으로 다룬다. 과로에 따른 죽음의 '반복성'과 과로와 죽음 간의 '연관성'에 방점을 찍은 책이다. 장시간 노동이 화두가 된 지 오래지만 여전히 과로죽음은 계속 늘고 있다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가령 노동의 고통을 표상하는 일터 은어는 버티고 버텨야 하는 삶을 살아가는 '존버씨'의 장시간 노동 일상을 나타내는 경험적 증거다. 방송 노동자는 앞뒤 장면이 자연스럽게 겹쳐지며 화면이 전환되는 디졸브 효과처럼, 오늘과 내일의 경계가 없이 '디졸브' 노동을 한다. 콜센터 노동자는 화장실에 드나들 때마다 메신저로 '화출·화착'을 보고해야 한다. 서비스 출시 전 고강도 철야 근무를 하는 게임 노동자의 '크런치 모드', 신임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과도한 규율과 괴롭힘을 뜻하는 간호 노동자의 '태움'은 익숙한 용어가 됐다.
이는 유혈적인 성과 경쟁과 과도한 업무량, 빠듯한 인력, 권위주의적 조직문화가 만들어 낸 시대의 표상이다. 업무 프로세스는 혁신을 거듭하고 있지만 문제는 낡은 조직문화다. 단순히 노동시간 길이를 늘린 과거와 달리 성과주의 시대의 '쥐어짬'은 자기착취에 기반한다. 과로가 유발하는 질병도 신체질환에서 정신질환으로 옮겨 가고 있다. 성과주의 담론에 억눌린 노동자들은 회사를 떠나는 선택지를 고르지도 못한다. 그만둠은 때로 실패와 부적응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코로나19 재난 상황으로 필수 노동자의 과로 문제가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와 관련해서도 "재난이 야기한 많은 문제는 사실 그 사회의 일반적 특징"이라고 단언한다. 아울러 영웅이나 전사로 호명하며 희생을 동원하는 방식의 재난 대응은 또 다른 사회적 갈등과 불평등을 양산한다고 말한다.
더욱이 노동의 고통을 해방시켜 줄 것으로 기대했던 정보통신혁명, 신기술의 등장으로 노동시간과 업무량은 오히려 늘었다. 디지털 플랫폼 시대에 노동과 비노동의 경계는 흐릿해지고 SNS 호출 등 업무는 일상으로 침투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로에서 벗어날 방안은 있을까.
저자는 당장 이 책을 통해 과로죽음에 개념과 언어를 부여하는 것을 과로사회 탈출의 첫걸음으로 삼고 있다. 자본친화적인 관점과 감각이 일상 깊숙이 파고들면서 한국인의 과로에 대한 인식은 유럽연합(EU) 국가와 비교할 때 무감각에 가깝다.
과로사·과로자살 모두 법제도적으로 규정된 표현은 아니다. 저자는 과로죽음의 전국 단위 실태조사와 함께 '사회적 타살'로서 과로죽음에 대한 사회적 설득과 공감을 담아낸 언어를 발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과로+성과체제를 낯설게 보고, 감내의 언어나 불가피성의 논리에 균열을 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굳이 저자가 책에 언급한 우리 시대 '존버씨'의 여러 과로죽음 사례가 아니더라도 쥐어짜기식 노동의 폐해는 현실에서 수도 없이 발견된다. 올 들어서만도 전봇대에 올라 홀로 전기 작업을 하던 30대 노동자의 감전 사망 소식이 뒤늦게 알려졌고, 무리한 시공 가능성이 제기되는 아파트 신축 공사 현장의 붕괴 사고로 현장 노동자들이 피해를 입었다.
170여 년 전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저서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을 통해 '사회적 타살'이라는 용어를 처음 썼다. "사회가 프롤레타리아 수백 명을 제 수명보다 일찍 부자연스럽게 죽을 수밖에 없는 위치로 내몰 때… 그럴 때 사회적 행위는 틀림없이 살인"이라고 했다. 저자가 서문에 적었듯 "현재의 이야기도, 한국을 염두에 둔 이야기도 아니지만 주어를 21세기 대한민국으로 바꿔 읽어도 크게 어색하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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