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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을 찾는 게 정치다

입력
2022.01.12 00: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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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없는 리더 선입견 짙은 회색인
실용, 실증 중시 정치 영역서 재평가
흑과 백 사이 균형 찾는 정치 기대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세상은 흑백이 아니고 회색이야." 1994년 개봉하여 국내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영화 '긴급명령'에서 CIA 리터 부국장이 라이언 박사(해리슨 포드 분)에게 던진 대사이다. 영화를 보지 않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라이언 박사는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세우고자 하는 영웅으로, 리터 부국장은 대통령의 불법적인 지시를 따르고 이를 은폐하고자 시도하는 악당으로 묘사된다.

영화에서처럼, 세상을 회색으로 보는 사람이 주는 이미지는 그다지 좋지 않다. 세상을 흑백으로 보는 사람에게서 흔히 드러나는 선명하고 확고한 신념, 선악에 대한 명확한 판단, 자신감에 넘치는 단호한 태도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자기 확신이 부족하고, 조심스러우며, 자신을 투명하게 드러내지 않을 것 같은 인상마저 준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리더의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부류의 사람이다.

인기가 없을 것 같은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치관이나 선호는 개인적인 영역에 묻어 둔 채, 공적인 영역에서는 세상을 회색으로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세상을 자기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본인의 이념이나 직관보다는 객관적인 자료와 실증적인 근거에 의존한다. 자신의 의지를 굳이 타인에게 강제할 의사가 없는 까닭에 다양한 의견을 경청하고 이를 합리적으로 조정하기 위해 노력한다. 세상사가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여러 가지 대안을 마련하고, 각각의 긍정적·부정적인 면들을 꼼꼼하게 따진다. 필자는 이러한 '회색인'들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세상을 회색으로 볼 수 있는 렌즈는 특히 정치의 영역에서 절실하게 필요하다. 정치인은 누구나 국민이 원하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약속한다. 대다수 국민은 아마도 높은 소득을 얻고, 충분한 여가를 즐기며, 쾌적한 환경에서 살기를 원할 것이다. 또한 부가 평등하게 분배되고, 각 지역이 균형 있게 발전하며, 국민의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를 희망할 것이다.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지향하고, 다수가 행복한 사회의 모습을 공유하지만, 불행하게도 이상적인 사회의 요건들 가운데 적지 않은 것들은 서로 상충적이다. 이제까지 없었던 놀라운 혁신이 일어나지 않은 한, 우리 사회는 더 높은 소득과 긴 여가, 더 많은 일자리와 더 안정적인 일자리, 풍요로운 소비와 쾌적한 환경 사이에서 어려운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특정한 계층, 지역, 세대를 배려하려는 노력은 다른 계층, 지역, 세대를 배제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누구의 행복, 어떤 종류의 행복이 더 중요한지에 뚜렷한 답은 없다. 회색의 세계다.

정치는 결국 흑과 백의 중간 어디인가에 위치할 가장 적절한 회색의 균형점을 찾고, 이 빛깔을 만들어 내기 위한 조정과 타협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그 시작은 국민이 원하는 행복의 종류가 무엇인지, 그들 간에 어떤 보완과 상충의 관계가 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이다. 그리고 세부적인 정책들의 비용과 편익을 엄밀하게 따져서 우리 사회를 더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 결과로 얻어지는 행복한 사회의 이면에 우리가 잃게 되는 다른 종류의 행복이 있음을 정직하게 밝히고, 손해를 보거나 비용을 부담하게 될 국민의 이해를 구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필자는 세상을 회색으로 보는 태도가 이러한 일을 효과적으로 해내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실용적·다원적인 사고를 하고, 객관적·실증적 근거를 중시하며, 조정과 타협을 잘하는 정치인, 무엇보다 자신의 꿈이 아닌 국민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정치인이 늘어나고 국민의 지지를 얻게 되기를 희망한다.


이철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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