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주영(39)씨는 이발할 때 미용실 대신 바버숍을 찾는다. 외국계 해운회사에 다니는 그는 해외 출장을 다니며 봤던 유럽 남성들처럼 헤어스타일을 만들어 줄 곳을 찾다 8년 전 바버숍에 정착했다. 미용실에서도 비슷하게 자를 수 있었지만 원하는 스타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다. 남성 헤어만 전문으로 하는, 설명이 필요 없는 바버숍의 존재는 반가웠다. 그는 "저는 헤어스타일을 되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며 "가격이 비싸다면 비싸다고 볼 수 있지만, 흔하지 않은 나만의 스타일을 찾아줘 만족한다"고 말했다.
바버숍을 찾는 남성들이 늘어나고 있다. 바버숍(barbershop)은 말 그대로 이발소로, 새로운 개념의 공간은 아니다. 끊임없이 진화해온 미용실과 다르게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 명맥이 끊긴 이발소가 201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현대적으로 재탄생한 장소다. 한마디로 요즘 사람들이 다니는 '힙한 이발소'다. 컷 한 번에 보통 5, 6만 원, 면도까지 하면 10만 원에 육박하지만 외모와 스타일에 적극 투자하는 남성들이 늘면서 바버숍 수도 급증하고 있다. 여성들의 '탈코르셋' 움직임으로 정체됐던 뷰티·패션 시장은 '그루밍족'의 등장을 환영하고 있다.
15분 컷? 남성 헤어도 1시간 컷!
지난달 27일 찾은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바버숍 '더데퍼룸'. 곽한별(30) 바버가 한 남성 고객의 머리를 1시간 가까이 손질하고 있었다. 미용실에서 보통 남성 헤어 컷에 소요되는 시간은 15분 안팎이지만 바버숍은 기본 1시간씩 걸린다. 대부분 바버숍이 예약제로 운영되는 이유다. 곽씨는 "헤어살롱(미용실)이 다양한 헤어스타일에 초점을 맞추는 대중적 의류 브랜드라면, 바버숍은 개인의 두상이나 모질을 보고 작업을 하는 맞춤 정장 브랜드로 이해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대전에 거주하는 김모(32)씨도 이런 차이 때문에 미용실에서 바버숍으로 갈아탔다. 김씨는 한 달에 두 차례 바버숍을 방문해 머리와 수염을 다듬는다. 그는 "바버숍은 똑같은 짧은 머리라 하더라도 사이드파트, 아이비리그 컷, 슬릭백 등 여러 스타일을 자세히 설명해준다는 게 미용실과 다르다"며 "이발할 때도 칼을 사용하기 때문에 더 깔끔하고, 나에게 딱 맞는 머리를 한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바버숍은 면도를 할 수 있어 미용업이 아닌 이용업으로 등록된다.
남성, 헤어숍의 '객(客)'에서 주인공으로
미용실에서 남성 고객은 그간 객식구 취급을 받았던 게 사실이다. 곽씨가 원래 미용실에서 일을 시작했다가 4년 만에 바버숍으로 옮기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남성 고객 머리를 제대로 하고 싶지만, 여성 파마나 염색이 남성 컷보다 몇 배 수익을 내다 보니 미용실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작업하다 손을 놔야 할 때가 많았다"고 떠올렸다.
1805년 문을 열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바버숍'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트루핏앤힐' 청담본점 이황모 브랜드 매니저는 "미용실의 비즈니스 구조상 남성은 주체가 되지 못하고 '객(客)'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다"며 "한 시간 동안 오롯이 자기 자신한테 휴식을 주는 공간, 편하게 머리 깎는 공간에 대한 남성들의 수요가 높아졌다"고 분석했다. 2017년 전국에 30여 개 남짓했던 바버숍은 최근 4, 5년 새 서울 강남에만 200개가 넘을 정도로 보편화됐다.
남성 전용 헤어숍인 만큼 매장 인테리어도 남성 취향을 고려해 계획된다. 웰컴 드링크로 위스키를 주거나 남성들이 관심 많은 시계나 명품 브랜드와 협력해 전시 등 각종 문화 행사를 여는 고급 바버숍도 늘어나고 있다. 바버숍이 남성들의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다.
그루밍족 잡아라, 커지는 남성 뷰티·패션 시장
이처럼 더 이상 남성들은 '머리를 어떻게 잘라 드릴까요?'라는 질문에 우물쭈물하다 '그냥 알아서 잘라 주세요'라고 답하지 않는다. 뻘쭘해하는 대신 구체적이고 확고하게 자신의 스타일과 취향을 말한다.
자신의 외모와 스타일에 관심 많은 남성들이 늘면서, 관련 시장 역시 성장 중이다. 올리브영에 따르면 지난해 남성 고객의 연간 구매액이 전년 대비 20%가량 증가했다. 기초 화장품에 국한되지 않고 메이크업 쿠션, 컬러 립밤과 같은 색조 화장품, 바디·헤어용품 등으로 구매 품목도 다양하게 확대되고 있다.
코로나19로 침체된 백화점 시장도 남성 명품족을 신규 고객으로 끌어들이는 데 집중하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지난해 6월 루이비통 남성 전문 매장 입점을 끝으로 압구정본점 4층을 '맨즈 럭셔리관'으로 리뉴얼했는데, 지난해 11월까지 럭셔리관에서 2030 고객이 올린 매출은 전년도와 비교해 84.8% 늘었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MZ세대 남성을 중심으로 가치 소비를 추구하는 '포미족'이 증가하면서 명품 수요가 늘고 있다"며 "기존에는 부부나 연인끼리 남성복 매장을 방문했다면 지금은 남성 혼자 방문해 구매하는 경우가 늘고 있는 것도 특징"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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