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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고마운 줄도 몰랐다

입력
2022.01.06 22: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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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3일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중앙역에서 프랑스 파리를 오가는 첫 야간 열차 나이트제트의 승객들이 탑승을 기다리고 있다. AFP 연합뉴스

지난달 13일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중앙역에서 프랑스 파리를 오가는 첫 야간 열차 나이트제트의 승객들이 탑승을 기다리고 있다. AFP 연합뉴스

아침 8시 10분, 늘 같은 시간에 오던 버스가 도무지 보이질 않는다. 처음엔 버스도착 알림의 오류일까 갸우뚱하다가, 저 앞 사거리에서 차가 막히나 기다려도 봤다. 발을 동동 구르다 버스회사로 전화를 하니, 집단감염으로 다들 코로나 검사에 들어가 뜨문뜨문 결행이란다. 1시간에 한두 대 겨우 다니는 직행버스니 영락없는 지각이다. 탈 때마다 괜히 인사를 주고받았나, 너무 앞자리에 앉았었나, 온갖 불안한 생각이 꼬리를 물다 보니 다정한 아침인사마저 망설이게 만드는 시절이 참 서글퍼졌다.

눈을 감았다 뜨면 다른 장소로 옮겨가 있는 '공간이동'은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능력이지만, 현실은 고작 시속 4㎞의 속력을 내는 두 다리뿐이기에 내가 움직이는 길에는 언제나 고마운 분들이 있었다. 특히나 여행을 할 때면 그 나라의 교통수단이 더할 나위 없이 중요했다. 매일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가야 하니, 교통수단은 여행루트를 바꾸는 결정적 요소이자 여행의 시간 대부분을 보내는 보금자리였다.

잠들었다가 일어나면 완전히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는 야간열차를 타면 여행자의 밤은 온전히 기관사에게 맡겨진다. 거대한 빙하를 보기 위해 36시간 내내 달려가는 엘 칼라파테 행 장거리버스는 구석에서 번갈아 자며 운전해 주던 기사 분들 덕분이었다. 잠깐 잠깐 휴식시간 말고는 좁은 좌석에 몸을 구겨 넣고 버텨야 했던 36시간이 고역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되돌아보니 체 게바라가 모터사이클을 타고 달렸다는 루타 40(Ruta 40)의 풍광 속에서 뜨고 지는 태양을 편하니 앉아서 만날 수 있었다.

의자 등받이에 비비적거린 머리는 새 둥지처럼 엉클어지고, 엔진의 진동에 잠이 들었다가 출렁이는 브레이크에 깼다를 반복하다 보면 눈은 퉁퉁 부어 있었지만, 졸린 눈으로 맞이하는 새로운 태양은 늘 각별했다. 어쩌면 여행이란, 머물던 장소를 떠나 또 다른 곳에서 다시 태양을 만나는 것. 그것의 반복인 셈이다.

사실은 항상 똑같은 태양이었을 텐데 그런 시간은 아주 길고 또렷하게 새겨진다. 뜨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살던 364일이지만, 딱 하루 일 년의 첫날만큼은 모두가 주목하는 새해 일출처럼 말이다. 그래서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행이 인생을 길게 만들어준다고 이야기한다. 한 조각 한 조각 의미를 담은 기억이 많아지면 내 인생의 시간도 증폭의 마법을 부린다. 밤새 동해안으로 달려가 누구보다 더 가까이에서 일출을 맞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그런 마법의 시간을 찾는 건 아닐까?

슬그머니 사라져가는 야간열차와 야간버스가 그리웠던 요즘, 오스트리아 빈과 프랑스 파리를 연결하는 야간열차가 다시 열렸다는 소식에 "야호" 탄성을 질렀다. 기차표보다도 더 저렴한 저가항공이 대세가 되면서 굳이 긴 시간을 들여가며 타는 이가 없어 중단된 노선이었다. 14년 만의 부활에는 비행기보다 탄소배출이 적다는 친환경적인 이유도 있었고, 다닥다닥 붙어가는 비행기보다는 칸칸이 분리된 유럽식 기차객실을 찾는 이유도 있었다. 코로나19가 바꿔놓은 또 하나의 풍경이다.

다시 달리게 된 야간열차에서 밤을 꼴딱 새울 기관사 분들에게도, 새벽부터 머나먼 차고지에서 출발해 꼬박꼬박 회사까지 태워주는 버스기사 분들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부터 해야겠다. 덕분에 하루를 시작합니다, 당신이 오늘의 태양을 선물해 주셨습니다라고 말이다.


전혜진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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